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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조원 규모 유럽 방산 시장 재편
역외 기업엔 비공식적 진입 장벽
기술력 확보 전엔 ‘외부자’ 한계 뚜렷

국내 방위산업 기업 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에어로)가 유럽 현지화 전략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단순한 부품 납품이나 외국 기업으로의 진출이 아닌, 유럽 현지 생산 거점을 확보하고 산학 협력을 확대하는 등 ‘내부자’로 인정받기 위한 복합적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핵심 수출 지역이자, 군비 증강에 한창인 유럽이 역외 기업을 배제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한 대응으로 풀이된다.
‘바이 유러피안’ 장벽에 둘러싸인 유럽 재무장 시장
22일 방산업계에 따르면 한화에어로는 최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현지 방산기업 WB그룹과 합작법인 설립을 위한 텀시트(Term Sheet·계약 관련 주요 원칙과 조건을 명시한 합의서) 계약을 체결하고 유럽 현지 생산기지 구축에 나섰다. 신설 법인을 통해 폴란드군에 사거리 80㎞급 ‘천무’ 유도탄을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양사는 연내 합작법인 설립을 마무리하고 내년에 공장 설립에 나설 예정이다.
루마니아에는 K9 자주포와 K10 탄약 운반차를 생산할 공장을 건설한다. 한화에어로는 현재 공장 부지 선정을 마친 상태로, 이르면 2027년에는 생산이 가능할 것이란 설명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7월에는 루마니아와 K9 자주포 54문, K10 탄약 운반차 36대 등을 공급하는 1조4,000억원 규모의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들 생산 시설 운영을 위한 인력도 최대한 현지에서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한화에어로는 최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과대·부산대와 인력 채용, 산학 장학생 지원, 대학 내 연구·개발(R&D) 센터 설립 등을 협력하는 양해각서(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를 체결했다. 현장실습 및 교환학생 프로그램 등을 통해 인재 양성 단계부터 적극 지원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처럼 한화에어로가 유럽 현지화에 열을 올리는 배경에는 유럽연합(EU)의 ‘방산 블록화’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달 EU 집행위원회는 2030년까지 5년간 8,000억 유로(약 1,300조원)를 투자해 무기 구매를 늘리는 유럽 재무장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역내 방위 기술과 산업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유럽산을 더 많이 사야 한다”며 “역외 국가가 EU에 무기를 팔기 위해서는 현지에서 생산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경쟁력 있는 기업의 참여’를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바이 유러피안’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운 셈이다.

‘적당한 기술력+빠른 실행’으로 상생 기대
이 같은 장벽은 지난 30여 년간 쇠퇴의 길을 걸어온 유럽 방위산업이 몰려드는 무기 주문을 소화할 여력이 없다는 점에서 재무장 전략의 한계로 평가받는다. 과거 유럽은 냉전이 끝난 후 대규모 군축에 돌입했고, 신규 무기 발주 또한 대부분 취소했다. 심지어 기존 장비마저 중동이나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에 대거 매각했다. 남은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소위 ‘밥그릇 싸움’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유럽 방산의 효율성은 끝 모르고 추락했다.
사회 구조적 문제도 한몫을 했다. 독일을 비롯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 정부는 무기체계를 구매할 때 성능보다 일자리 창출 등 사회적 기여도를 더 중점에 뒀다. 이는 곧 일감을 쪼개 만든 수많은 하청·협력업체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업체 가운데 한두 곳이 멈추면, 무기체계 조립 공정 전체가 멈춰버리는 구조다. 행정비용과 물류·인건비 폭등으로 무기 가격이 상승했음은 물론이다.
한화에어로가 이 틈을 공략, 현지 공장 설립과 부품 조립 거점 확보를 통해 ‘외국 기업’이 아닌 ‘현지 생산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럽은 자국 내 일자리 창출과 산업 역량 회복이라는 목표 아래 직접 생산에 대한 욕구가 크지만, 이를 현실화할 기반은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는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고, 정치적으로도 한국과의 방산 협력이 활발해 매우 우호적인 환경의 유럽 관문으로 평가된다.
유럽 현지에서도 한국 기업의 진출을 반기는 분위기다. 이는 고도의 기술력보다는 실용적 경쟁력 덕분으로 풀이된다. 상대적으로 기술 복잡도가 낮은 무기 체계, 적당한 가격, 빠른 납기와 실행력 등 한국 기업들이 가진 특징이 당장 전력을 증강하려는 유럽 국가들에게는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분석이다. 직접 생산에 대한 욕구가 크지만, 그것을 실행할 기반은 부족한 유럽으로서는 자국민 고용까지 늘릴 수 있는 한화에어로의 진출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게 업계의 주된 시각이다.
진입엔 성공, 남은 숙제는 ‘살아남기’
다만 한국 방산의 경쟁력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와 속도전에 집중돼 있다는 점은 잠재적 한계로 지목된다. 유럽의 궁극적 목표가 미국 방산업체에 견줄 수 있는 고부가가치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있는 만큼, 기술 경쟁력이 결여된 단기적 협력은 언제든 종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화에어로가 유럽 친화적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넘어 기술 도약에 총력을 기울이는 배경이다.
구체적으로 한화에어로는 최근 몇 년간 일부 선진국만 보유한 항공 엔진 기술 자립을 위해 연구개발(R&D) 투자와 타 기업들과의 협력을 확대해 왔다. ‘브레이튼 사이클’에 기반해 흡입-압축-연소-팽창·배기의 원리로 작동하는 항공기 엔진은 열역학·유체역학·재료 공학·전자 제어·정밀 가공 기술이 총망라된 현대 공학 기술의 결정체로 불린다. 지금까지는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 일부 국가만 자체 기술을 보유해 진입 장벽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화에어로는 독자적인 첨단 항공 엔진 개발을 추진함과 동시에 엔진 원제작사와 개발-생산-판매-정비에 이르기까지의 수익과 리스크를 참여 지분에 따라 공유하는 RSP(Risk and Revenue Sharing Program) 사업을 통해 기술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여기에 자체 R&D 비용 또한 2022년 5,867억원에서 2023년 8,141억원, 2024년에는 8,878억원으로 해마다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기반 무인 무기체계가 주목받으면서 AI 관련 기술 역량 강화에도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한화에어로는 오는 2028년까지 차륜형 다목적 무인차량 아리온스멧(Arion-SMET), 자체 개발한 차세대 무인차량 그룬트(GRUNT), 올해 전력화 예정인 폭발물 탐지 제거 로봇 등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무인차량(UGV)을 확보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지난 2월에는 유럽 최대 UGV 기업 밀렘로보틱스와 공동 기술개발 및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