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한국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약 2,800억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판정에 대해 우리 법무부가 취소신청을 제기했다. 우리 정부는 론스타 판정이 ICSID 취소 사유 중 ▲권한유월 ▲절차규칙 위반 ▲이유 불기재에 해당된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론스타 사태에 국민 혈세가 낭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분쟁을 끝까지 이어 나가겠단 방침이나, 일각에선 이 같은 시간 끌기가 국내 외국인투자 유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법무부, ICSID에 론스타 판정 취소신청 제기
법무부는 1일 론스타가 2012년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과 관련해 "ICSID에 판정 취소신청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앞서 론스타는 지난 2003년 외환은행 지분 51%를 1조3,834억원에 사들인 뒤 여러 회사와 매각 협상을 벌이다 2012년 하나금융지주에 3조9,157억원에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론스타는 "한국 정부의 개입으로 더 비싼 값에 매각할 기회를 잃고 가격까지 내려야 했다"며 46억7,950만 달러(약 6조2,00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에 ICSID 중재판정부는 소송 제기 10년 만인 지난해 8월 한국 정부에 론스타가 청구한 손해배상금의 4.6%에 해당하는 2억1,650만 달러( 약 2,800억원)를 지급하라고 판정했으나, 우리 정부는 같은 해 10월 정정신청을 제기했다. 중재판정부가 배상원금을 과다 산정했고 판정 과정에서 이자의 중복계산 등 문제가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중재판정부는 지난 5월 우리 정부의 의견을 정부 인용하면서 우리 정부가 물어야 할 배상금을 6억원가량 감액했다.
다만 우리 정부 측은 여전히 ICSID의 결정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법무부는 중재판정부 판정 선고 이후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판정 내용을 검토한 결과 ICSID 협약상 취소 사유에 해당하는 법리상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ICSID 협약은 ▲중재판정부 구성 흠결 ▲판정부의 명백한 권한유월 ▲중재인의 부패 ▲절차규칙의 심각한 위반 ▲이유 불기재를 그 취소사유로 두고 있는데, 법무부는 론스타 판정이 이 중 ▲권한유월 ▲절차규칙 위반 ▲이유 불기재에 해당한다고 봤다. 법무부는 "법리상 오류가 있는 중재판정으로 인해 소중한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이 낭비돼선 안 된다는 판단으로 이 사건 취소신청을 제기하게 됐다”며 “정부의 취소신청이 인용되면 배상금과 이자 지급 의무는 전부 소멸하게 되므로, 향후 진행될 취소신청 절차에서 최선을 다해 판정을 제대로 바로잡겠다”고 역설했다.
론스타 "우리가 피해자, 韓 국내 정치에 희생됐다"
론스타 측은 우리 정부에 대한 반발을 드러내고 있다.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은 "우리의 (외환은행 매각) 계약은 위기에 처했으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며 "지금의 혼란은 4년간 모건스탠리를 통해 이 거래에 나섰을 때 예상했던 결과가 아니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한국의 민족주의 세력들은 론스타가 경제위기를 이용해 외환은행을 사들였다는 시각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우리는 한국 국내 정치의 희생자"라고 강변했다.
그레이켄 회장은 또 "론스타는 외환은행 지분매입 시 55%에 이르는 프리미엄을 지불했으며 한국에서 이뤄진 50건의 거래에서 모두 한국 법령을 준수했다"며 "론스타와 관련해 제기되고 있는 각종 불법 의혹들은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외환은행을 매입할 당시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고 있었고 외국자본의 투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불법 여부를 조사하고 세금 추징 움직임을 보이는 건 부당하다"고 힘줘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에서도 론스타 사태가 해외 투자자들에 한국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켰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최창규 명지대 교수는 "외자유치가 절실한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론스타가 돈을 벌어 나가려고 하자 딴죽을 건다는 게 외부의 시각"이라며 "외자를 투기자본과 동일시하는 듯한 이전 정부의 포퓰리즘적 분위기도 이런 상황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실제 '론스타 때리기'는 국회와 감사원이 앞장서 문제 제기를 하면서 한국의 신뢰도에 대한 외국인의 불신이 고조됐다. 특히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이 진행되는 사이 두 번씩이나 외환은행 매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외국인 투자자들 사이에선 "한국은 투자하기 힘든 나라"라는 의구심이 커져가는 모양새다.
끊이지 않는 국제 분쟁, 韓 정부의 '원죄'
외국인투자자는 투자유치국의 법원에 구제를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 외국인투자에 대한 국제법의 일반 원칙이다. 국내에서 일어난 일은 그 국가의 주권에 따르라는 게 국제법의 일반 원칙이란 것이다. 외국인은 남의 나라에 마음대로 들어가 투자할 수 없다. 받아들이는 국가가 정한 요건과 절차를 따랐을 때 비로소 허용된다. 일단 들어오면 그 국가의 법과 질서에 따라야 하며 거기 사는 사람들과 다른 특별대우를 요청할 수 없다. 외국인투자자가 투자유치국 내에서 사업을 영위하다가 그 국가와의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그 분쟁은 개인 대 국가의 국내 분쟁으로 재판의 권한은 그 국가의 법원에 있고, 그 재판에 적용될 법은 그 국가의 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부에 전담 부서를 따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외국인투자와 관련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우리 정부가 국제법의 일반 원칙에 예외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1974년 10월 네덜란드와, 같은 해 12월엔 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동맹과 이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체결된 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동맹과의 조약은 그 후 2006년 12월 12일 체결돼 2011년 3월 27일 발효된 새로운 조약으로 대체되는데, 론스타 사태는 바로 이 조약에 근거해 발생했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에 유효하게 존재하는 투자 조약의 수는 2,646개였고, 그중 대부분은 양자간투자조약이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우리나라의 투자조약중재는 국제 표준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미국은 서유럽의 어느 나라와의 사이에도 투자조약을 체결한 바 없으며, EU에 속한 국가 서로 간에는 투자조약중재가 애초부터 허용되지 않는다. 투자조약중재가 국제 표준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결국 우리 정부의 '원죄'가 지금까지도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