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미사일 ATACMS(에이태큼스)를 지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당초 미국은 전쟁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 아래 장거리 미사일 공급을 망설여 왔으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교착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지원을 유력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번 장거리 미사일 지원으로 우크라이나는 다소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크림반도 내 러시아 드론 기지 등 타격을 통해 대러시아 압박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외신은 전했다.
FT "美, 우크라이나에 에이태큼스 지원"
10일(현지 시각)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에 따르면 존 파이너 미국 국가안보 부보좌관은 이날 우크라이나에 대한 장거리 미사일 지원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미국은 협의 테이블에서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새로운 ‘힘’을 발표하겠다는 결정은 없지만 우크라이나가 전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며 "조만간 결단이 내려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안드리 예르막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 또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에이태큼스가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며 “곧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가시화했다.
우크라이나 지원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장거리 미사일 에이태큼스는 사거리가 300km가 넘는 장거리 전술 탄도미사일이다. 앞서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지원한 장거리 미사일인 스톰 섀도와 스칼프(SCALP) 순항 미사일보다 사거리가 60km 가량 길다. 에이태큼스가 우크라이나에 배치되면 러시아 병참기지나 사령부 등 본토가 타격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된다.
FT는 “우크라이나가 운용 중인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로 발사할 수 있어 사용하기가 더 유리하다”고 분석했다. 특히 전투기 등을 통해 공중에서 발사해야 하는 스톰 섀도·스칼프와 달리 에이태큼스는 지상에서 발사할 수 있다. 전투기 부족 등으로 러시아 대비 공중 전력에 열위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무기가 에이태큼스인 셈이다.
첨단 무기 지원 꺼리던 美, 전쟁 장기화에 '결단' 내렸다
그간 미국은 첨단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경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넘어 서방 국가들에 대한 침공까지 감행할 수 있다는 우려에 에이태큼스 등 무기 지원을 망설였다.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해 7월 “에이태큼스를 보내는 건 러시아를 자극해 3차 세계대전을 부추길 수 있다”고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6월 우크라이나가 대반격에 나선 이후에도 영토 수복에 어려움을 겪자 미국은 결국 우크라이나에 첨단 무기를 공급하고 나섰다. 우크라이나에 F-16 전투기를 인도하기로 확정한 미국은 최근 열화우라늄탄 지원까지 공식화했다.
미국의 우크라이나 첨단 무기 지원이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은 지난 5월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겨냥한 공습을 강화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계속 지원해야 하는 이유"라며 에이태큼스 지원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아직 진행 중(that is still in play)"이라고 답한 바 있다. 이에 당시 키라 루딕 우크라이나 의원은 트위터를 통해 "최근 러시아의 공격은 우리 요청의 시급성을 입증한다"며 "장거리 무기가 최대한 빨리 지원돼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러시아 간 눈치 싸움이 결국 우크라이나에 유리한 방향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한편 영국, 프랑스는 이미 우크라이나에 사거리가 250km 이상인 장거리 미사일을 지원한 바 있다. 지난 7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전 “우크라이나가 더 깊숙하게 공격할 수 있도록 새로운 미사일을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당시 로이터는 프랑스 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마크롱 대통령의 발표 전에 이미 스칼프 순항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한 외교 관계자는 “현재 스칼프 미사일 50발을 우크라이나에 보내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스칼프 미사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 개발했으며, 스텔스 성능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투기를 통해 공중에서 발사되며 그 사거리는 250㎞ 이상이다. 영국도 지난 5월 ‘스톰 섀도’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보내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기 지원 요청에 응답한 바 있다.
타격 범위 넓어진 우, 러시아 압박 수위 높이나
이번 장거리 미사일 지원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장악한 자국 영토 동부 깊숙한 곳까지 타격이 가능해졌다. 프랑스 군 관계자는 “러시아는 이미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 발사한 순항 미사일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가 더 어려운 타깃을 격파할 수 있게 두 국가 간 힘의 균형을 다시 맞춘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 각국은 장거리 미사일 배치를 통해 대러시아 압박을 강화함으로써 러시아를 협상장에 이끌겠단 생각이다. 우크라이나가 구체적인 타격 목표 리스트까지 제공하며 장거리 미사일 유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단 점도 러시아 압박 강화 효과가 기대되는 지점이다.
실제 CNN에 따르면 지난해 우크라이나는 에이태큼스를 지원받기 위해 우크라이나군의 구체적인 타격 목표를 정확히 기술해 최근 미국 측에 전달했다. CNN은 "타격 목표 가운데는 원거리 러시아 병참선, 방공 무기 및 공군 기지, 크림반도를 포함해 러시아 동·남부 지역의 무기고 등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크림반도 내 러시아 드론 기지도 공격 대상으로 꼽힌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현재 이란제 드론을 우크라이나 전쟁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를 차단함으로써 전황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다는 우크라이나의 노림수가 보인다.
이에 러시아는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확대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열화우라늄탄 지원 방침이 알려진 이후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은 “미국은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키이우를 계속 돕겠다고 한다”며 “다른 말로 하면 우크라이나를 계속 전쟁 상태에 두고 마지막 우크라이나인이 죽을 때까지 전쟁을 수행하도록 돈을 아끼지 않고 지원하겠다는 뜻”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 위협이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한편 미국은 러시아 핵무기 사용에 대응해 비상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임박한 핵무기 사용 징후도 없고 실제 사용 가능성도 작지만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미국은 러시아가 핵무기 관련 조치에 나설 경우 직접 핵무기를 사용하기보다는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원전을 타격하거나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핵 장치를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핵 과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