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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건설 시장 내 한국 굴삭기의 입지가 눈에 띄게 좁아졌다. 2021년 일본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선 중국이 지난해 일본 수입액의 2배를 기록, 압도적 1위 자리를 거머쥐면서다. 최근 내수 시장 공략을 마친 중국 건설기계 제조사들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글로벌 시장 진출에 힘을 쏟는 양상이다. 국내 건설기계 제조사는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해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요하는 북미, 유럽 등지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베트남 시장 점령한 中 건설기계
26일 코트라 하노이무역관이 발간한 '베트남 건설기계(굴삭기) 시장동향'에 따르면, 올 상반기 베트남의 두산 굴삭기 수입액은 전년 동기 대비 52.3%나 급감했다. 현대 굴삭기 수입액 역시 61.7% 줄었다. 일본의 고마쓰, 히타치 굴삭기 수입액이 각각 전년 동기 대비 29.8%, 28.8% 감소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눈에 띄는 감소폭이다.
지난해 베트남의 한국 굴삭기 수입 규모는 직전년도 대비 6%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일본 제품 수입액 증가율은 33%에 달했다. 베트남 굴삭기 수입시장 1·2위를 나란히 차지했던 일본과 한국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셈이다. 시장 판도 변화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었다.
중국은 최근 들어 베트남 건설기계 시장의 압도적 1위로 올라섰다. 일본 및 한국 기업 제품을 선호하던 베트남 기업들이 최근 들어 '가성비'를 중시하기 시작, 저렴한 중국 제품을 찾고 있다는 분석이다. 박정호 하노이무역관은 "최근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베트남 부동산 시장의 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면서 베트남 건설 업계에서 투자 비용을 절감하고 효율성을 높이고자 비교적 저렴한 중국산 건설 기계를 찾는 기업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내수 수요 잡았다, 글로벌 시장 넘보는 中
내수 시장 공략을 마친 중국 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해외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 중타이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중국의 건설기계 수출액은 198억9,000만 달러(약 25조300억원)로 전년보다 32%나 급증,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베트남 외에서도 중국과 여타 국가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일례로 중국 최대 건설기계 제조사 싼이중공업(SANY)은 독일, 인도, 인도네시아 등지에 생산 기지를 설립하는 등 세계 시장 공략에 총력을 기울였고, 결국 지난해 세계 건설기계 제작사 4위 자리를 차지했다. 유럽의 건설 전문 조사기관 KHL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 기준 세계 10위권 건설기계 제작사 명단에는 싼이중공업은 물론 서공그룹(XCMG, 3위), 줌라이언(Zoomlion, 7위) 등 중국 기업이 다수 이름을 올렸다. 이들 3사의 점유율 합계는 2019년 14%에서 지난해 19.2%로 눈에 띄게 증가했다.
같은 기간 글로벌 3위였던 미국의 존 디어는 5위로 순위가 하락했으며, 점유율은 5.5%에서 4.9%로 감소했다. 글로벌 1위인 캐터필러는 점유율이 16.2%에서 13.8%로, 2위인 고마쓰는 11.5%에서 10.9%로 줄었다. 글로벌 건설기계 업체 대다수가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기술력 중심으로 변모하는 韓 기업
가격에서 밀린 국내 기업들은 북미, 유럽 등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HD현대의 건설기계 부문 중간 지주사 HD현대사이트솔루션(HD현대건설기계·HD현대인프라코어)이다. HD현대사이트솔루션은 올해 초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법(IIJA)'으로 인해 증가한 미국 건설기계 수요를 흡수하며 시장 공략에 성공했다.
HD현대건설기계의 북미 매출액은 올 상반기 5,184억원으로 지난해 동기(2,921억원) 대비 훌쩍 뛰었다. HD현대인프라코어의 같은 기간 북미 시장 건설 기계 판매 대수 역시 올 상반기 2,048대로 전년(975대)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상반기 매출은 3,325억원에 달했다.
한편 탄소 중립 흐름을 타고 건설업계에서 자리를 잡은 에너지저장장치(ESS) 분야에서도 국내 기업의 사투가 이어지고 있다. 중국이 저렴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중심으로 시장 침투를 이어가는 가운데,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ESS 시장을 중심으로 시장을 공략하는 양상이다.
ESS는 용도에 따라 가정용, 상업용, 전력용, 통신용 솔루션 등으로 분류하며, 대부분 높은 에너지 밀도를 요구한다. 특히 전력용, 무정전 전원공급장치(UPS) ESS는 국내 배터리 업체의 강점인 '삼원계 배터리'와 유사하게 고출력, 고에너지 밀도를 요구한다. 국내 업체가 중국을 누르고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큰 '성능 중심' 분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