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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추가 채권을 발행할 것을 결의하자 장기채 금리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3일(현지시간)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국채 장기 이자율은 지난 1주일 전보다 무려 0.4% 가까이 치솟으며 장기채 금리 인상 기조를 이어갔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미국 하원에서 연방 정부의 채무 한도를 늘릴 것을 결의한 만큼, 당분간 장기채 발행 기조가 이어질 것을 감안해 시장이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채권 발행 물량이 늘어나는만큼 시장 가격이 떨어져 이자율이 상승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국 장기채 금리 폭등, 은행 줄도산 이어진다는 우려도 확산
30년 만기채는 1주일 전만 해도 4.5%의 이자율을 나타냈으나, 하원 결정이 알려지자 10년 만기와 30년 만기 채권 이자율이 크게 뛰었다. 은행권 전문가들은 미국 연방정부 계획대로 당분간 장기채 발행 물량이 예정된 만큼, 장기 이자율은 높은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고금리 시대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내년 상반기 금리 인하를 고려할 것이 아니라 장기 불황을 염두해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투자자들 사이에 연준(Fed)이 오랜 기간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유지할 것이라는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면서 이날 뉴욕 증시는 일제히 하락했다. 특히 채권 가격 급락으로 제2의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며 은행주들의 주가가 더 크게 빠졌다. 다른 나라 국채 금리도 동반 상승세다. 독일의 10년물 국채는 2011년 유로존 재정 위기 후 최고치인 2.97%까지 상승했다. 미국 장기채 금리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데다 유럽 주요국들의 장기채 금리가 금융위기 수준으로 뛰어오르자, 장기 이자율 상승이 글로벌 은행들의 자산 안전성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는 모습이다.
국채 금리가 더 오를 수도 있다는 전망도 속속 등장한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설립자 레이 달리오는 3일(현지시간) 그리니치 경제포럼에서 “높은 인플레이션이 더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급등하고 있는 10년물 국채금리가 5% 임계 값까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은행권 자산 가격 하락, 부실 확산에 촉각
장기채 금리 인상에 미국 지방은행들의 자산 안전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따르면 2분기 은행 대차대조표에서 국채 가격 하락에 따른 미실현 손실은 총 5,584억 달러(약 754조원)에 달한다. 전 분기 대비 무려 8.3%나 증가한 수치로, SVB가 채권 가격 하락 시점에 예금 마련을 위해 손해를 보고도 국채를 팔면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이 일어난 것처럼 다른 중소 은행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고금리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기업들의 자금 마련에도 비상이 걸렸다. 3분기 실적 발표 후 금리 인하기에 맞춰 회사채 발행을 목표로 했던 기업들은 장기채 금리 인상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에 빠졌다. 30년 만기 모기지 고정 금리도 평균 7.72%까지 상승해 201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0년 만기 채권 이자율이 5%에 육박한 데다, 시장 전망이 상승에 방점을 찍으면서 10년 만기 이자율도 5%를 넘을 수 있다는 우려에 모기지 금리도 선제적으로 뛴 것이다.
고용 지표는 계속 활황, 이자율 낮출 가능성 낮다는 사실 받아들이기 시작해
금리는 계속 인상 중인 상황이지만 고용 지표는 전혀 나빠지지 않았다. 미국 노동부가 공개한 구인·이직보고서(JOLTS)에 따르면 8월 민간기업 구인 건수는 961만 건으로 전월 대비 69만 건(7.7%) 증가했다. 이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집계한 시장 전망치 880만 건을 크게 웃도는 규모다. 고용시장이 여전히 활황인 만큼 금융권에서는 Fed가 긴축 정책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월가 주요 기관들의 금리 인상 예측치를 집계하는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Fed Watch)에 따르면 11월에 예정된 금리 결정에서 추가 인상도 가능하다는 예상이 점차 힘을 얻는 것으로 확인됐다. 1주일 전 20%에도 미치지 못했던 '베이비 스텝(0.25% 금리 인상)' 예상이 무려 23.6%로 뛰어올랐다.
장기채 금리가 고공행진하면서 유가 움직임도 하락세로 돌아섰다. 월가 전반적으로 경기 침체를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에너지 수요도 크게 감소해 공급 부족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뉴욕상업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배럴당 94.98달러에 달했던 두바이유는 3일(현지시간) 91.43달러로 떨어졌다. 시장에서는 주요 산유국의 감산 결정이 가시화되기 전에는 장기채 금리 인상 탓에 당분간 유가가 100달러 이상으로 뛰지는 않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