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생성형 AI와 함께 뒤집힌 반도체 시장, 이제는 'HBM' 경쟁 시대 삼성전자-SK하이닉스 필두로 경쟁 구도 형성, 마이크론까지 참전 CXL 등 미래 먹거리 탐색 본격화, 시장 선점하는 기업이 이긴다
반도체 업계 내 고대역폭메모리(High Bandwidth Memory, HBM) 경쟁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구축을 위한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자, 수년 전까지 주목받지 못하던 HBM이 기업의 시장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품목으로 부상한 것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차세대 시장 선점을 위한 '초격차 경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내 기업 중심으로 'HBM 경쟁' 촉발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와 용량을 극대화한 제품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함께 생성형 AI 시장의 '필수재'로 꼽힌다. AI 산업이 성장할수록 HBM 수요 역시 급증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실제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HBM이 D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년 9%에서 올해 19%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AI 기술 보편화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 경쟁의 중심축 자체가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는 치열한 HBM 시장에서 40%에 달하는 점유율을 확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4세대 제품인 HBM3을 양산하고 있으며, 올해 상반기에는 5세대 HBM3E 양산에도 착수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진만 삼성전자 DS부문 미주총괄 부사장은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올해 HBM 시설 투자를 2.5배 이상 늘리고, 내년에도 그 정도 수준을 예상한다"며 사업 역량 강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SK하이닉스는 HBM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50%)를 달리고 있다. 생성 AI용 GPU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와 성공적으로 파트너 관계를 구축, 선두 주자 자리를 꿰찬 것이다. 실제 지난해 12월에는 엔비디아가 차세대 GPU 블랙웰 'B100' 출시를 2분기로 앞당기고, SK하이닉스와 해당 제품에 탑재될 HBM3E 우선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치열한 HBM '미래 시장' 선점 경쟁
이들 기업은 차세대 제품인 HBM4(6세대 HBM) 시장 선점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차세대 HBM 경쟁의 관건이 '파운드리 역량'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HBM 제작 시에는 고객사의 세부적인 요구 사항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높은 성능이 요구되는 차세대 HBM의 경우, 추가 기능을 포함할 수 있는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정을 거쳐야 할 가능성이 크다. HBM의 두뇌 역할을 수행하는 '로직다이' 역시 첨단 파운드리 공정으로 제작해야 HBM의 전력 소모를 줄이고 성능을 높일 수 있다.
자체 파운드리 역량이 부족한 SK하이닉스는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협력'을 선택했다. HBM4부터는 타사와의 협력을 통해 파운드리 공정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이다. 유력 협력 후보로는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가 거론된다. TSMC는 AI 반도체 시장의 '큰손'인 엔비디아와 이미 탄탄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TSMC와의 협력이 현실화할 경우, SK하이닉스의 HBM 시장 영향력이 한층 확대될 수 있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는 차세대 HBM3E 제품 사업화와 HBM4 개발을 동시에 진행 중이다. 내년부터 HBM4 샘플링 작업에 착수하고, 내후년에는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HBM4의 로직다이 생산은 자체 보유한 파운드리에 맡길 방침이다. 메모리 반도체, 파운드리, 첨단 패키지 등 자체적인 생산 역량의 '시너지'를 창출, HBM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한편 국내 반도체 기업을 중심으로 촉발된 차세대 HBM 선점 경쟁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전반까지 확산하고 있다. 현재 HBM 시장 3위를 달리고 있는 미국 마이크론이 대표적인 예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말 5세대 HBM인 'HBM3E' 시제품 출하를 마쳤으며, 올해부터 이를 본격 양산할 예정이다. 한국 기업이 대거 포진한 HBM 시장 경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차세대 HBM으로 승부수를 건다는 전략이다.
멈추지 않는 반도체 '미래 먹거리' 탐색
생성형 AI 열풍이 낳은 반도체 경쟁은 HBM에서 끝나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D램의 확장성을 무기로 삼은 ‘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CXL)’ 기술을 HBM의 뒤를 이을 미래 먹거리로 낙점했다. CXL은 다수의 메모리 반도체를 연결해 거대한 공용 메모리 풀(pool)을 형성, △중앙처리장치(CPU) △메모리 △GPU △저장장치 등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인터페이스다. 서버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메모리 용량을 늘릴 수 있어 대규모언어모델(LLM)의 초고속 데이터 처리를 위한 차세대 인프라로 평가된다.
CXL 기술을 활용하면 연산에 필요한 메모리 성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AI 시장에서 HBM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HBM 분야의 선두 주자가 SK하이닉스가 아닌 삼성전자라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2021년 5월 세계 최초로 CXL 기반 D램 기술을 개발했으며, 지난해 12월 업계 최초로 기업용 리눅스 1위 기업 레드햇과 CXL 메모리 동작 검증에 성공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다음 달 삼성전자가 차세대 CXL 솔루션을 공개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삼성전자의 뒤를 뒤쫓는 SK하이닉스는 2022년 8월 DDR5 D램 기반 첫 96GB CXL 메모리 솔루션 샘플을 개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업계 최초로 CXL 기반 연산 기능을 통합한 메모리 솔루션 CMS 개발에 성공, 이를 'OCP 글로벌 서밋 2022'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OCP 글로벌 서밋 2023'에서는 CMS 2.0을 포함한 SK하이닉스의 CXL 솔루션 3종이 베일을 벗었다. HBM·CXL을 중심으로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경쟁이 본격화한 가운데, 업계는 치열한 경쟁이 시장에 불러올 변화에 촉을 곤두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