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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내 홍콩H ELS 손실 배상안 발표 전망
투자 경험 유무에 따라 배상액 차등 산정 유력
“정부의 배상안 마련, 투자자 책임 간과” 비판도
올해 들어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에서 발생한 원금 손실이 6,000억원(약 4억4,843만 달러)을 넘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운데 금융당국이 배상안 마련에 고심을 거듭하는 모습이다. 이르면 이달 내 공개 예정인 배상안에는 과거 ELS 상품 투자 경험이 있는 투자자에 대해서는 배상액을 줄이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품 이해도 높을수록 배상 규모 축소 예상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 당국은 ELS 투자자의 과거 투자 경험을 배상액 산정 기준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투자 경험 유무에 따라 배상액을 차등하거나, 투자 횟수가 많을수록 배상액의 규모를 줄이는 등의 방식이다. 앞서 금융 당국은 2019년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증권(DLF) 손실 사태를 수습할 당시에도 관련 투자 상품 구매 경험에 따라 배상 비율을 차등 적용한 바 있다. 관련 상품에 대한 투자 경험이 있다면, 그 특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만큼 배상 비율에도 이를 적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과거 투자에서 수익을 낸 투자자에 대해서는 배상액을 추가 하향 조정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이익을 봤을 때는 침묵하고, 손실 발생 시에만 배상을 요구하는 사례를 용인할 경우 투자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과거 수익의 일부를 이번 홍콩H지수 ELS에서 입은 손실에서 공제하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금융 당국 관계자는 “과거 수익을 최근 손실에서 공제하는 등의 안은 구체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있다”면서도 “소비자가 과거 수익을 낸 경험 등을 따져 손실 배상액을 차등하는 방안 등을 살펴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금융 당국이 최소 배상 비율을 설정할지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과거 DLF 배상에서 당국은 기본 배상 비율을 투자자별 손실액의 20%로 책정한 바 있다. 은행이 개인투자자에게 제시한 서류 등에서 다수의 문제가 발견됐을 정도로 금융기관의 불완전판매 정황이 심각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이번 홍콩H지수 ELS 판매와 관련한 조사 과정에서는 DLF 사태와 같은 공통적이면서 심각한 불완전판매 혐의는 찾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ELS 배상안에 최소 배상 비율이 담기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주를 이룬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단순 손실을 이유만으로 배상을 요구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최소 배상 비율이 없거나 미미할 경우 전반적인 손실 보전 수준 또한 DLF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DLF의 손실 배상액 규모는 최대 80%에 달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투자자별 투자 경험, 연령 등 세부 기준을 마련해 기준 충족 여부에 따라 배상 비율을 단계적으로 조정하는 식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며 “DLF 사태 때는 은행권을 몰아붙일 ‘한 방’이 있었지만, 이번엔 그 정도의 상황이 아닌 만큼 최저 배상액을 정하기 난해한 모양새”라고 말했다.
은행을 제외한 금융기관을 찾아 ELS 상품을 구매한 경우는 배상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논의된다. 증권사가 대표적 예다. 원금 보장 상품이 주를 이루는 은행과 달리 증권사를 찾는 투자자들은 상품의 원금 손실 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비슷한 이유로 창구 직원의 권유 없이 온라인을 통해 직접 가입한 투자자도 배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유력 검토 중이다.
금융감독원이 여러 배상안을 검토하는 가운데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NH농협)에서 판매한 홍콩 H지수 ELS 상품 확정 손실액은 6,000억원을 돌파했다. 은행권에 따르면 이들 4개 은행에서 올해 들어 이달 16일까지 만기가 돌아온 상품은 1조2,117억원어치로, 그중 5,559억원만 상환됐다. 6,558억원의 원금이 손실로 남으며 전체 손실률은 54%에 달했다.
“배상 기준 마련, 정부 아닌 법원의 몫”
금융 당국의 손실 배상안 발표가 목전으로 다가온 가운데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부 금융기관의 불완전 판매를 빌미로 정부가 직접 나서 배상안을 마련하는 것은 투자자의 책임을 비롯한 시장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나아가 정부의 배상 압박이 실제 불완전판매로 인한 피해자와 단순 투자 실패자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정부 차원의 배상안 마련에 정치적 상황이 적용될 우려가 있는 만큼 배상 기준 마련 주체가 법원이 돼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정치적인 시각을 배제한 채, 불완전판매로 손실을 본 사람들의 소송 제기를 통해 법원이 배상 수준을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도권 한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는 “시중은행의 불완전판매 정황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만큼 이번 사안은 개별 은행과 투자자가 민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금융 당국은 여러 상황을 고려해 마지막까지 다양한 배상안을 검토할 계획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지금까지 확정된 안은 없지만, 다양한 배상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며 “조사 결과 워낙 다양한 사례가 발견돼 공정성에 중점을 둔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