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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측 지지하던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 모녀 측과 주식매매계약 체결
전체 의결권 과반 수준 지분 확보한 모녀, 경영권 분쟁 판도 바뀌나
형제 체제 이후 주가 하락 겪은 한미약품, 부진한 성과에 결단 내린 듯
형제 측 우호 세력으로 분류되던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모녀 측으로 돌아서면서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 회장이 돌아서면서 모녀 측이 최대 주주 지위를 탈환해 경영권을 되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직계가족과 우호 지분을 더해 전체 의결권 과반에 준하는 지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신동국 회장, 한미약품 모녀에 힘 싣기
4일 업계에 따르면 법무법인 세종은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과 임주현 한미약품그룹 부회장이 보유한 그룹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지분 일부를 신 회장이 매수하는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거래 지분은 444만4,187주로 6.5%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주당 매입 가격은 3만7,000원으로 3일 기준 종가(3만1,150원)보다 18.78% 높다.
주식매매계약 이후 신 회장의 지분은 12.43%에서 18.93%로 늘어날 예정이다. 송 회장, 장녀 임 부회장, 신 회장의 합산 지분율이 34.79%에 이르게 되는 셈이다. 직계가족과 우호 지분을 더하면 약 48.19%로 전체 의결권의 과반에 근접하는 수준의 지분을 확보하게 됐다. 송영숙·임주현 모녀와 한미사이언스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공동으로 행사하기로 하는 '의결권 공동행사 약정'도 체결했다. 연대 의사를 직접 명문화한 것이다.
이로써 한미약품그룹 내 경영권 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지난 3월까지만 해도 경영권 분쟁의 승기는 형제 측이 잡은 듯했다. 당시 주주총회에서 형제 측이 승리하면서 회사 이사회에 진입한 후 차남인 임종훈 이사가 한미사이언스 대표로 취임한 데다 장·차남이 나란히 한미약품 의사회까지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주식매매계약으로 모녀 측이 순식간에 지주사 주식의 과반에 가까운 지분을 확보하게 되면서 모녀 측에 힘이 실렸단 평가가 나온다.
상속세 부담도 상당 부분 덜었다. 앞서 지난 2020년 창업주 임성기 회장 별세 이후 한미약품그룹 오너 일가엔 약 5,40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가 부과됐다. 이후 오너 일가는 지난 3월 700억원 규모의 3차 납부 기한을 지키지 못해 11월로 납부 기한을 미룬 상태다. 현재 남은 상속세는 약 2,644억원에 달하며, 한미그룹 오너 일가가 받은 주식담보대출 금액은 5,379억원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송 회장과 임 부회장이 주식을 매각하면 매각 대금으로 상속세 납부 재원이 충당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관계자는 "상속세 부담을 덜면서 소액주주들의 정당한 주식가치 평가를 방해해 온 '오버행' 문제가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형제 우호세력들, 부진한 성과에 등 돌렸나
주목할 만한 점은 당초 신 회장이 형제 측 우호 세력 중 한 명이었다는 점이다. 지난 주주총회에서도 신 회장은 "임종윤·종훈 형제가 새 이사회를 구성해 회사를 빠르게 안정시키고 기업의 장기적 발전과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한 후속 방안을 지속 모색하기를 바란다"며 형제 측에 힘을 실었다. 이런 가운데 신 회장이 갑작스럽게 모녀 측에 힘을 싣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하자, 업계에선 "내부 체제가 형제를 중심으로 안정화했음에도 뚜렷한 성과가 나오지 않은 데 대한 실망감을 느끼고 돌아선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업계에 따르면 형제 측은 당장의 성과보단 중장기적인 체제 유지에 집중했다. 상속세 납부를 위한 재원 마련에 나선 게 대표적이다. 지난달 장남인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사내이사와 임종훈 대표는 한미사이언스의 지분 일부를 매각해 상속세를 납부하겠단 입장을 밝혔다. 형제 측이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은 각각 12.40%, 8.42%가량이다. 상속세 문제를 해결해 오버행을 하루빨리 해소하겠단 게 최종 목표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상속세에만 집중한 탓에 경영권 분쟁으로 불거진 오너 리스크에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실제 형제 체제가 확립된 이후 한미사이언스와 한미약품의 주가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지난 3일 기준 한미약품의 주가는 정기주총일 대비 18% 하락했고, 한미사이언스 종가는 29.8% 고꾸라졌다. 이는 경영권 분쟁의 불씨로 작용한 한미약품그룹과 OCI그룹 통합계획이 발표된 지난 1월 12일보다도 떨어진 수준이다. 한미사이언스는 1월 12일 종가(3만8,400원) 대비 18.9% 내려갔고, 한미약품도 같은 기간 20.5% 하락했다. 형제 체제 이후 기업 경쟁력을 오히려 상실한 셈이다.
한미약품그룹과 개인적 인연 깊은 신 회장
한편 신 회장이 성과가 부진한 형제 측에 등을 돌리자 일각에선 "신 회장의 한미약품에 대한 애정이 돋보인다"는 평가도 나온다. 신 회장의 한미약품그룹 투자는 별세한 임성기 회장과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됐다. 신 회장과 임 회장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로, 임 회장이 고향과 관련된 모임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알게 됐다. 이후 두 사람은 고향 발전을 위한 모임을 함께 하며 막역한 사이로 발전했고, 이 인연으로 신 회장은 2000년 한미약품이 동신제약을 인수할 당시 자신이 보유한 60만 주의 동신제약 지분을 장외거래로 넘겼다. 본격적인 협력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신 회장이 한미약품그룹에 직접 투자를 시작한 건 2010년부터다. 당시 신 회장은 임 회장의 권유로 한미사이언스 주식 113만1,692주(12.53%)를 취득했으며, 2014년엔 신 회장뿐만 아니라 특수관계에 있는 이숙자씨, 한양정밀도 한미약품 주식을 사들였다. 이처럼 한미약품그룹과 개인적인 인연이 깊다 보니 기업의 부진을 해결하지 못한 형제 측에 불신이 더 커졌을 수 있단 게 이들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