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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단지 묶는 '통합 재건축' 이해관계자 많아 사업 지연 가능성↑ 가구 수·입지·집값 다를수록 충돌

수도권에서 한 지역에 밀집된 여러 아파트 단지를 하나로 묶어 재건축·재개발을 추진하는 ‘통합 재건축’ 시도 단지가 늘고 있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 녹지 공간, 커뮤니티 시설, 주차 공간 등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지역 랜드마크 단지가 돼 시세를 주도할 것이란 기대도 있다. 하지만 단지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갈등도 늘고 있다. 설득할 구성원이 많아지다 보니 단지별·구성원별 합의를 하는 것도, 사업 속도를 높이는 것도 더 어려워지는 것이 통합 재건축의 한계다.
분담금·역세권 위치 등에 단지마다 갈등
16일 정비업계 등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는 창신1~4구역 재개발 정비계획을 기존 소단위 방식에서 통합개발 방식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창신동은 골목이 많고 획지 구분이 불규칙해 소단위 정비로는 도로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 정비계획 추진하던 창신동 주민들은 주민동의를 다시 받아야 하는 데다, 통합 개발로 인해 공공기여 항목이 추가되면서 조합원 분담금이 늘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서울시 고시에 맞춰 재개발을 추진하던 토지소유자와 시행사는 정비계획 변경에 따른 손실과 사업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앞서 서울시는 2022년 4월 창신1·2구역은 소단위 정비방식으로, 3·4구역은 일반정비형으로 정비구역 지정과 정비계획 결정을 고시했지만 이후 종로구청이 통합 재개발로 변경을 추진했다. 그동안 재개발사업에 대한 인허가 절차는 보류돼 왔다.
강남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강남구 개포경남·우성3차·현대1차는 지난 2월 재건축 정비구역 및 정비계획 결정안을 수정 가결했다. 세 단지를 합하면 총 1,499가구 규모(개포경남 678가구, 우성3차 405가구, 현대1차아파트 416가구)다. 정비계획 변경으로 건폐율 50% 이하, 용적률 300% 이하 규모로 공동주택 2,320가구(공공주택 365가구 포함)와 부대·복리시설이 신축될 계획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단지별로 대지지분이 달라 발생하는 주민들 간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단지별·평형별 추정 분담금이 공개되면서 소유주 간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경남 1차 재건축추진준비위원회는 지난해 11월 긴급 설명회를 열고 갈등 해결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경남 1차 주민들은 용적률과 대지 지분에 비례한 독립정산제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정산제는 단지별로 수익(분양)과 비용(지출)을 따로 정산하는 것으로 아파트별로 적용된 용적률 등이 달라 생기는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위한 방법이다.
통합 추진 속 좌초 단지 속출
갈등을 풀지 못하고 와해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 있는 상록우성·상록라이프는 지난해 통합 재건축을 추진하다 제자리재건축 갈등을 풀지 못하고 무산됐다. 제자리재건축은 개별 단지가 위치한 자리에 다시 재건축해 입주하는 통합 재건축의 한 방식이다. 입지에 차이가 있는 경우 통합에 속도를 내기 위해 제자리재건축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제자리재건축을 놓고도 이견이 생길 경우 상록우성과 상록라이프처럼 사업 결렬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제자리재건축 문제는 정자역과의 근접성을 두고 벌어졌다. 상록우성은 상록라이프보다 정자역에서 가깝다. 상록라이프도 멀지 않지만 상록우성을 지나 30m 폭의 도로를 건너야 한다. 상록우성은 통합 논의 초반부터 제자리재건축을 정관에 넣어 명확히 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상록라이프는 이에 반대하면서 초반부터 단지 간 감정이 상했다.
갈등은 결국 단지 간 주도권 싸움으로 격화됐다. 시발점은 상록라이프의 주민설명회였다. 상록라이프 추진준비위원회가 주민설명회 자리에서 상록우성과 합의가 덜 됐음에도 통합 재건축 추진을 언급했고, 상록우성 소유주들은 이에 불만을 제기했다. 여기에 상록라이프 추진위가 상록우성 집마다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전단을 돌리면서 민원이 폭주했고 결국 관리소장이 상록라이프를 고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상록우성의 단지 규모가 1,700가구, 상록라이프가 700가구로 다르다는 점도 갈등으로 작용했다. 조합 방식으로 통합 재건축을 추진할 경우 조합장과 감사는 누가 할지, 대의원 비율은 어떻게 할지, 의결권은 어떤 비율로 할지 등 사사건건 부딪쳤다.

정비계획 신속성과 주민 합의 간 균형이 핵심 변수
통합 재건축을 추진하는 단지가 많아진 것은 정부가 유도한 영향이 크다. 특히 1기 신도시는 통합을 전제로 한 ‘노특법(노후계획도시 정비 및 지원에 관한 법)’이 아니고서는 재건축 사업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통합해 재건축에 나서는 분위기가 당연해지고 있다. 통합 재건축의 이점을 누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추진한 곳도 있지만, 이런 외부 환경으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발을 디딘 곳도 있다.
정비업계의 새로운 장르가 된 건 분명하지만, 그 끝은 장담할 수 없다. 낡은 아파트 단지 하나를 부수고 새로 짓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여러 단지를 합치는 건 더 어렵다. 실제로 통합 의지가 큰 1기 신도시에서도 논의 과정에서 결렬된 사례가 적지 않다. 한 통합 재건축 추진위원회 위원장은 "통합을 추진하는 모든 단지가 어려움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전문가들도 입 모아 '몇 배는 더 힘든 작업'이라고 말한다. 사업비용을 줄이고, 통합 후 단지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분명한 이점에도 추진하면서 잡음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반대로 통합 재건축이 순항하고 있는 단지는 모두 공통점이 있다. 단지별 이익을 따지기보다 통합 이후 얻게 될 이득에 가치를 뒀다는 점이다. 성급히 통합을 추진하기보다 주민들과의 소통으로 충분한 공감대를 얻고,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선제적으로 고민했다는 점도 같다. 추진위원장 혹은 조합장은 충분한 사전 지식으로 주민들과 투명한 소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