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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 관세전쟁에 韓 기업 불똥 中 '희토류 갑질' 본격화 LS-베트남, 포스코-미국 대안시장 확보 총력

중국 정부가 한국 기업에 ‘중국산 희토류를 사용해 생산한 제품을 미국 군수업체에 수출하면 제재하겠다’는 내용의 경고성 공문을 보냈다. 미국 정부가 미국산 반도체의 대중국 우회 수출을 통제해 온 것과 같이, 중국도 전략광물인 희토류의 ‘제3국 수출 통제’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미·중 양국이 벌이는 패권 전쟁에서 한국 기업이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모양새다.
中, 韓 전력설비 제조사에 '희토류 경고장'
23일 설비업계에 따르면 전력 설비 제조사인 A사는 최근 중국 정부로부터 “중국산 중희토류가 들어간 전력 설비 등을 미국 방산업체와 미군 등에 수출하지 않겠다는 점을 보증하고, 위반 사항이 적발될 경우 제재받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 제재의 구체적 내용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우회 수출 적발 시 중국산 중희토류를 팔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이 같은 공문은 또 다른 전력 설비 제조사인 B사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정부는 전력 설비 업체뿐 아니라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전기자동차, 항공우주, 의료장비 등 중국산 전략광물을 수입해 쓰는 다른 업종 기업도 대부분 같은 공문을 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중국이 중국산 전략광물 전반의 제3국 수출 통제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문을 수령한 A사는 완제품이 군수용이 아닌데도 계열사와 관계사를 대상으로 전수 조사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수출 품목 중 ‘이중용도(민·군 겸용) 물품’이 섞여 있는 경우 중국 당국이 문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압기에 부착되는 전자·전력제어 설비엔 중국산 중희토류가 적지 않게 쓰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격 '제3국 수출 통제' 칼 꺼내든 中
중국이 한국 기업에 자국 희토류를 활용한 완제품을 미국 군수업체에 팔지 말라고 경고한 건, 중국이 제3국 수출 통제에 나선 첫 사례다. 이달 초 미국의 초고율 관세에 대한 대응으로 희토류의 대미 수출 금지 조치를 취한 중국이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 다른 나라도 통제에 동참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 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율 대중 관세 조치에 대응해 네오디뮴·디스프로슘·테르븀 등 7종 희토류 원소와 관련 자석에 대해 수출제한을 단행했다. 특히 미국 방산기업 27곳에는 중희토류를 ‘이중용도물품’(군수용과 민간용으로 모두 쓸 수 있는 물품)으로 지정해 아예 수출을 금지했다. 이들 소재는 전기차 모터, 풍력 터빈 등 고성능 산업재에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동안 제3국 수출 통제는 서구권, 특히 강대국인 미국이 북한 러시아, 이란 등 적국을 상대로 사용해 온 ‘보도(寶刀)’였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중국은 수출 통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중국은 세계 4대 수출 통제 체제인 바세나르체제(WA), 핵공급국그룹(NSG),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호주그룹(AG) 중 NSG에만 가입했다. 중국은 미국이 첨단 반도체에 대한 대중국 우회 수출을 통제할 때도 “제3자가 중국과 정상적인 무역을 펼치는 데 장애물을 만들고 함부로 간섭하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이 제3국 수출 통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韓 산업계, 희토류 확보 ‘발등 불’
중국의 느닷없는 경고에 오는 24일 미국과의 ‘2+2 무역협의’를 앞둔 정부는 고민이 커졌다. 중국 상무부는 최근 “미국에서 관세를 면제받기 위해 중국의 이익을 희생하는 거래를 할 경우 반격하겠다”고 경고했다.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패권 전쟁에서 한국이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게다가 한국의 1, 2위 수출국인 미국과 중국이 관세 전쟁 과정에서 제3자 수출 통제를 계속 확대하면 우리 기업의 수출이 크게 위축될 것이 자명하다. 산업부는 아직 중국의 요구 수위가 높지 않다고 보지만 기업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다르다. 자칫 중국 수출 통제를 어겼다가 희토류 공급이 끊기면 제품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LS, 포스코 등 희토류 공급망 관련 사업자들의 발걸음도 바빠지고 있다. 먼저 LS에코에너지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등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에 대응해 베트남 정부와 함께 안정적인 현지 조달 체계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며 “지난 2월 방한한 베트남 산업무역부 장관과 만났을 당시 베트남 정부 차원의 지원을 약속받았다”고 밝혔다. 또한 LS에코에너지는 현재 희토류 사업 추진을 위해 경영지원 부문장 등으로 구성된 팀을 가동 중이다. 향후 희토류 트레이딩 업무를 담당할 인력을 추가 확보할 계획이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미국산 희토류 확보에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달 미국 최대 희토류 기업 에너지퓨얼스와 디뮴-프라세오디뮴(NdPr) 산화물 납품 관련 전략적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NdPr은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생산하는 전기차용 구동모터코어 생산에 필요한 원료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현재 샘플 테스트용 희토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로, 샘플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에너지퓨얼스와 NdPr 산화물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지난해 말에도 미국 리엘리먼트테크놀로지와 중·경질 희토류 수급을 위한 MOU를 맺었다. 현재는 리엘리먼트의 원료 확보 역량, 가격 경쟁력 등을 검토하는 단계다.
아예 수급이 불안정한 희토류를 대체하고 재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하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부터 7개 대학과 함께 3년간 관련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공동 연구실 운영에 들어갔다. 정부 및 산업계 차원의 추가 대응도 이뤄진다. 한국 정부는 희토류 비축량을 기존 6개월분에서 18개월분으로 확대했고, 대다수 기업들도 3~6개월치 재고를 축적해 단기적 충격에 대비한다. 산업계는 중국의 전략광물 수출제한 우려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왔으며, 앞으로도 미국·호주·베트남 등 대체 공급망 구축 노력을 지속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