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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B, 이례적으로 현금 중요성 강조
디지털 불가항력에 대한 공포 확산
거대 인프라 ‘싱글 포인트 리스크’ 부상

네덜란드 중앙은행이 자국민들에게 11만원 상당의 현금을 상시 소지하라고 권고하면서 유럽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디지털 결제 시대에 중앙은행이 현금 보유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디지털 인프라에 대한 회의와 불안이 주요 원인으로 거론된다.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 클라우드 대란에 이어 최근에는 스페인 정전 등 연쇄적인 인프라 마비 사태가 발생하면서 디지털 시스템의 회복력에 대한 논의 또한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72시간 생존 위한 최소 현금 보유해야”
23일(이하 현지시각) 유로뉴스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네덜란드 중앙은행(De Nederlandsche Bank, DNB)은 전날 모든 시민에게 “전산망 먹통 등에 대비하기 위해 항시 소액 현금을 준비해 둘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DNB가 제시한 최소 금액은 성인 1인당 70유로(약 10만9,000원), 어린이 1인당 30유로(약 4만7,000원)다. 비상 상황에서 72시간, 즉 사흘치 식수와 음식, 의약품, 교통비 등을 충당할 금액이라는 설명이다.
DNB는 이 같은 권고와 함께 금융 위기는 물론 자연재해, 대규모 정전, 사이버테러 등 모든 비상 상황을 예로 들었다. 단순한 계좌 오류나 애플리케이션 결제 불가 같은 불편을 넘어 금융 인프라 전체가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디지털 인프라가 항상 안전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현실 인식이 발언의 핵심인 셈이다.
이 같은 발언이 공개되면서 유럽 내 금융권과 시민 사이에서는 ‘현금 회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했다. 오랜 기간 동안 유럽 각국은 디지털 결제 인프라 확장과 현금 없는 사회 구현에 힘써왔지만, 이번 발표는 그 흐름에 정면으로 반하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네덜란드는 비접촉 결제와 모바일 뱅킹의 선진 사례로 꼽히는 국가이기에 중앙은행이 직접 현금의 필요성을 환기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은 더욱 강조되는 분위기다.
디지털 리스크 대응 전략 재정비
DNB의 경고성 메시지와 유럽 전역을 뒤덮은 위기의식의 배경에는 지난 4월 스페인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가 자리하고 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15기가와트(GW) 규모의 전력이 불과 5초 만에 손실되면서 국가 전력망이 순식간에 마비됐다. 오전 0시 30분께 발생한 정전은 같은 날 정오가 되도록 절반가량만 복구되며 시민들의 불편을 키웠다.
스페인 정전 사태의 여파는 디지털 결제망, 교통 시스템, 응급 의료체계까지 동시에 덮쳤다. 이는 일상화한 디지털 인프라가 전기와 통신이라는 복합적 기반 위에 세워져 있으며, 하나라도 흔들릴 경우엔 전체 시스템이 붕괴할 수 있다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그간 ‘무현금 사회’를 표방하던 지역일수록 피해 체감이 심각했고, 최소한의 오프라인 결제 시스템조차 마련되지 않은 사업장에서는 영업 자체가 불가능했던 탓이다.
해당 사건 이후 유럽은 ‘디지털 리스크’에 대한 대응 전략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각국 중앙은행은 “만약 정전이 발생해 모바일 뱅킹이나 카드 단말기가 작동하지 않으면, 시민은 생필품 하나 사기도 어려워진다”고 우려를 표하며 그간 디지털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무현금 정책이 실은 극단적인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인식을 일깨웠다. 이후 ATM 네트워크 유지와 수기 결제 시스템 복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으며, 각종 공공기관과 민간 기업들은 현금 인프라 재점검을 서둘렀다.
결국 스페인의 사례는 단순한 국가별 위기 상황을 넘어 유럽 전체에 걸쳐 디지털 의존성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만든 계기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특히 국가별 이동이 잦고 관광객 유입이 많아 무현금 인프라를 확대해 온 유럽 내 대도시들은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곧 위험”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편의성에만 초점을 맞췄던 기존의 관점이 아날로그적 생존 가능성이라는 키워드 아래 다시 쓰이게 된 배경이다.

‘오프라인 복원력’ 중요성 커져
지난해 7월 발생한 마이크로소프트(MS)의 클라우드 시스템 장애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당시 MS의 클라우드 플랫폼 애저(Azure)와 오피스365, 팀즈 등 주요 서비스가 연쇄적으로 멈췄고, 이들 시스템을 기반으로 운영되던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일제히 패닉에 빠졌다. 항공 예약 시스템이 정지되면서 수백 편의 항공편이 결항됐고, 은행권에선 온라인 거래가 중단되며 수백만 명의 금융 소비자가 계좌 접근에 실패했다. 심지어 일부 국가에서는 비상 시를 대비해 구축해 둔 응급 통신망까지 먹통되면서 사실상 ‘IT 대란’이라는 표현이 과장되지 않을 만큼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다.
MS는 이 같은 사태의 원인으로 클라우드 기반으로 제공하는 크라우드스트라이크가 배포한 업데이트 패치의 오류를 지목했다. 전 세계적으로 2만 곳 이상의 이용자를 보유한 크라우드스트라이크가 배포한 업데이트 패치가 MS 윈도와 충돌한 탓에 이를 사용하던 서버와 PC가 멈췄다는 진단이다. 크라우드스트라이크는 해킹 위협을 막기 위한 보안 소프트웨어 팰컨 센서(Falcon Sensor)의 업데이트에 문제가 생겨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봤다. 평소 팰컨 센서 프로그램은 MS 클라우드 애저에 기반해 본사 시스템과 연결된 상태로 운영되지만, 업데이트는 서버나 PC 단위에서 이뤄지는 바람에 충돌을 피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최소 10억 달러(약 1조4,000억원) 규모의 피해를 낳은 MS 사태는 거대 디지털 인프라의 문제점을 명확히 드러냈다. 하나의 거대 플랫폼에 모든 기능이 집중된 탓에 단 한 번의 시스템 충돌이 전 세계 수많은 산업을 마비시킨 것이다. 그간 비용 효율성과 확장성 측면에서 최적의 선택처럼 여겨지던 클라우드 시스템은 해당 사건을 계기로 ‘싱글 포인트 리스크(Single Point of Failure)’라는 근본적 한계를 외면할 수 없게 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프라인 백업에 대한 논의도 다시 활발해지는 모습이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구식으로 취급되던 수기 장부와 현금 기반 거래 시스템 등이 ‘최후의 생존 수단’으로 재조명되면서다. 특히 금융권에서는 네트워크 단절 시에도 기본적인 거래가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전개되는 양상이다. 디지털 인프라에 대한 과신이 단일 사고에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만큼 모든 시스템은 반드시 ‘오프라인 복원력’을 내장해야 한다는 게 전 세계 산업계의 달라진 인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