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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전 모델 대비 50% 이상 성능 향상
기술 주도권 회복 위해 공조 가능성
비용·유연성 강점 GDDR7 아우르는 전략

삼성전자가 AMD에 HBM3E 12단 제품을 공급하며 AI 반도체 시장에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알렸다. 그동안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력 논란과 후발주자 이미지에 갇혀 있던 삼성전자는 이번 납품을 통해 시장 신뢰 회복의 기회를 잡았다. 특히 AMD와의 협업은 일회성 공급을 넘어, 중장기적 파트너십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최근에는 GDDR7 채택 움직임까지 확산하면서 삼성전자는 HBM과 GDDR을 아우르는 유연한 전략으로 시장 내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엔비디아 독주 AI 반도체 시장 균열 예고
12일(현지시각) AMD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서 열린 ‘AI 어드밴싱 2025’ 행사에 참석해 자사의 신형 AI 가속기 MI350X·MI355X에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의 HBM3E 12단이 탑재된다고 밝혔다. 그간 삼성전자가 AMD에 HBM을 납품 중이라는 소식은 암암리에 전해졌으나, AMD가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며 양사의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도입되는 HBM3E 12단 제품은 삼성전자가 지난해 개발한 것으로, 24Gb(기가비트) D램 칩을 TSV(Through-Silicon Via) 기술로 총 12단 수직 적층해 총 36GB(기가바이트)의 고용량을 제공하는 게 특징이다. 초당 최대 1,280GB의 대역폭을 제공하고, 1,024개의 입출력(I/O) 통로에서 초당 최대 10Gb의 속도를 처리할 수 있다. 이는 전작인 HBM3E 8단 제품 대비 성능과 용량 측면에서 50% 이상 향상된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HBM3E 12단 공정에서 어드밴스드 TC NCF(Thermal Compression Non-Conductive Film) 기술을 적용해 8단 제품과 동일한 높이의 패키지 규격을 구현했다. 또 칩 간 간격을 7마이크로미터로 최소화해 수직 집적도를 20% 이상 높였다. 전력 효율과 성능을 동시에 끌어 올리려는 의도에서다. 이번 MI350 시리즈 탑재는 이러한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했음을 입증하는 사례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AI 반도체 시장은 사실상 엔비디아의 독주로 전개돼 왔다.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뿐 아니라 이들 제품과 함께 사용되는 HBM 수급까지 엔비디아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성능 AI 칩용 HBM3 제품군의 주요 고객사인 엔비디아가 삼성전자 제품을 채택하지 않으면서 삼성전자는 기술력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경쟁 열위로 밀려나는 분위기였다. 이번 AMD의 채택을 통해 삼성은 기술력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HBM 시장 내 약지 이미지를 벗어날 계기 또한 마련하게 됐다.
AMD의 MI 시리즈 확장, 삼성전자엔 절호의 기회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AMD의 기술 협업 가능성을 눈여겨보는 모양새다. AI 반도체는 GPU와 메모리 간의 통신 효율과 발열 분산, 전력 최적화 등 다층적 기술 조율이 필요한 분야다. 이는 공급자가 단순히 메모리를 납품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GPU 설계 단계부터 맞춤형 HBM을 공동 기획하는 형태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기술 내재화와 제품 공동 최적화라는 형태로 이어질 여지가 크다는 분석이다.
시장 확대 가능성도 주목할 만하다. AMD는 현재 데이터센터, 고성능 컴퓨팅, 국방·과학 연구 기관 등 다양한 영역에서 MI 시리즈 기반의 AI 반도체를 확장 중이다.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의 고용량 HBM이 안정적으로 연동되는 경험을 쌓게 되면, 공급 범위는 MI350을 넘어 MI400·MI500으로도 확대될 수 있다. 한 번 신뢰를 확보한 공급사와의 거래를 이어가는 것이 업계의 일반적 관행이라는 점에서도 삼성전자는 중장기적 성장 채널을 확보한 셈이다.
궁극적으로 이 같은 협업은 양사 모두에게 기술 주도권 회복이라는 전략적 기회를 제공한다. AMD는 엔비디아와의 기술 격차를 줄일 수 있고, 삼성은 HBM 분야에서 후발주자 이미지를 벗고 제품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다. 양사가 지속적으로 성과를 축적해 나갈 경우, 단기 공급 계약을 넘어 정기적 제품 공동 개발과 공동 마케팅, 반도체 생태계 차원의 협력 모델로 확장될 가능성도 크다. 이는 AI 반도체 시장의 고착한 구조를 깨고, 보다 유연하고 경쟁적인 시장 환경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전망이다.
“HBM만이 답은 아냐” GDDR7 채택 시도 늘어
이와 함께 HBM이 AI 반도체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고 있던 분위기에도 균열이 감지된다. GDDR7은 HBM보다 대역폭은 낮지만 가격과 발열, 전력 소비 측면에서 효율이 뛰어나 보급형 AI 솔루션에 적합한 대안 메모리로 부상 중이다. 엔비디아는 이미 중국 시장용 AI GPU에 GDDR7을 채택하고 있으며, AMD 역시 비슷한 방향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메모리 선택에 있어 성능과 비용을 동시에 따지는 실용적 전략이 강화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GDDR7이 변수로 떠오른 배경에는 AI 반도체 시장의 세분화가 자리하고 있다. 초고성능 연산이 필요한 데이터센터용 GPU와 상대적으로 연산량이 적은 엣지AI, 산업용 GPU가 서로 다른 메모리 전략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HBM은 성능 면에서 우월하지만, 비용 부담과 공급 안정성 측면에서 여전히 한계를 안고 있다. 특히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양강 구도로 좁혀진 HBM 시장에서는 공급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대안 모색도 필요해졌다.
이 같은 흐름은 삼성전자에 또 다른 기회가 된다. HBM에서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삼성전자는 GDDR7에 있어서는 업계 선도 기술력과 대규모 생산 능력을 모두 갖춘 플레이어로 평가된다. 엔비디아와 AMD가 GDDR7을 적극 채택하게 되면, 삼성전자은 가격 경쟁력이 높은 제품으로 전체 시장 내 존재감을 끌어올릴 수 있다. 나아가 HBM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전략적 유연성까지 확보하게 된다.
이처럼 AI 반도체 시장은 단일 해법이 통하지 않는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최고의 성능이 필요한 곳에는 HBM이, 그렇지 않은 곳에는 GDDR7 같은 합리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다층적 메모리 전략’이 부상 중인 것이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HBM과 GDDR7 모두에서 공급 역량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정 기술에만 의존하는 경쟁사 대비 유리한 포지션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HBM 후발주자라는 시선에 머물기보다 시장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적 플레이어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