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發 100배 비자 장벽, 英·獨·中 ‘두뇌 유치’ 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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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 H-1B 취업비자, ‘10만 달러 장벽’ 美 기업 글로벌 경쟁력 약화, 첨단 일자리 해외로 내몰아 각국 ‘인재 모시기’ 경쟁 치열, 비자 옥죄기 결국 ‘자충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강행한 H-1B 비자 수수료를 둘러싸고 흉흉한 전망이 꼬리를 물고 있다. 미국 취업 허가가 매월 5,000건 이상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스타트업들의 성장 발판을 단절시킬 것이란 비관론도 나온다. 미국 첨단 산업을 이끌고 있는 인재들의 이탈이 크게 늘어날 가능성도 제기됐다. 실제 전 세계 인재 풀에서 멀어진 미국 기업들이 대혼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영국과 중국 등 해외 국가들은 이 틈을 파고들어 인재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취업 허가 월 최대 5,500건 감소, 자본력으로 기업들 갈라치기도
29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JP모건은 최근 보고서를 내고 백악관의 H-1B 비자 수수료 도입으로 인해 이민자의 취업 허가가 월간 최대 5,500건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해당 정책이 미국 전체 노동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으로 보이지만 IT 기업과 인도 출신 이민자들에게는 파장이 클 전망"이라고 밝혔다.
2024년 회계연도 기준 H-1B 비자 승인자의 약 3분의 2가 컴퓨터 관련 직종이었고, 승인된 청원의 절반이 전문직과 과학, 기술 서비스 부문에 집중됐다. 전체 승인 가운데 인도 출신의 비중이 71%에 달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취업 목적의 H-1B 비자 청원은 약 14만1,000건으로, 이 가운데 6만5,000건 정도가 해외에서 처리됐는데 JP모건은 해당 비자가 새로운 수수료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와 함께 해외 숙련 노동자에 의존하는 미국 기업에서 연 최대 14만 개, 월 1만 개 이상 신규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고액의 비자 수수료가 IT 섹터를 중심으로 미국 기업들을 자금력이 견고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을 갈라놓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0만 달러(약 1억4,000만원) 비자 수수료가 실리콘밸리에 '선택적 장벽'을 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일부 빅테크 수장들은 수수료에 대해 신중한 긍정론을 펼쳤다. 엔비디아의 젠슨황 최고경영자(CEO)와 오픈AI의 수장 샘 올트먼은 CNBC와 공동 인터뷰에서 낙관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넷플릭스의 리드 헤이스팅스 회장도 소셜미디어(SNS) X에 올린 글에서 "훌륭한 해결책"이라며 고부가가치 일자리 이외 다른 용도의 H-1B 비자 신청을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소프트웨어 업체 리플링의 파커 콘래드 CEO 역시 비자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의미라면 기꺼이 10만 달러를 지불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트럼프 행정부가 자본력이 충분한 대기업들만 넘을 수 있는 장벽을 치고 있다는 비판이다. 미국 코넬대 산하 첨단기술 대학원 코넬테크의 그렉 모리셋 학장은 “대기업은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지만 스타트업에는 치명적”이라며 “이번 수수료 인상은 신생 기업들의 성장을 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메타 같은 글로벌 기업도 H-1B를 통해 성장했다”며 이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英·獨, 美 외국인 인재 ‘스카웃’ 경쟁
트럼프 행정부의 비자 장사가 인재 유출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 이때를 놓칠세라 주요국들은 미국의 기술 인재들을 대거 스카웃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현재 이런 움직임의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건 유럽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최상위 글로벌 인재를 대상으로 비자 수수료 일부를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핀테크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기업) 기업 클레오(Cleo)의 창립자 바니 허시-여는 취업 플랫폼 링크드인 등에 “만약 미국을 떠나고 싶은 고급 인재들이 있다면 우리가 나서 적극 돕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자사의 런던 지사를 통해 이런 내용의 채용 공고를 무려 100개나 낸 것으로 알려졌다. 채용 공고에서 클레오는 H-1B 비자로 어려움을 겪을 근로자들을 겨냥해 “비자문제로 미국에서 쫓겨나는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 당신의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하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변화에서 최고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적극적인 스카웃 의사를 밝혔다.
영국의 기술 정책 및 스타트업 지원 단체인 스타트업연합(Startup Coalition)도 인재 유치를 위해 적극 나섰다. 스타트업연합은 공식적으로 영국 정부에 “트럼프 행정부의 H-1B 비자 단속을 적극 활용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행 인재들의 발길을 영국으로 돌리게 하는 적극적 정책을 주문한 것이다.
독일 역시 이번 사태를 ‘황금 기회’로 보고 있다. 독일 디지털 산업 연합체 비트콤의 베른하르트 로흐레더 대표는 “미국 새 정책은 독일과 유럽이 최고의 인재를 끌어들이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필립 아커만 인도 주재 독일 대사도 독일의 이민정책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현대적이며 예측가능하다”며 인도 인재들에게 독일에서의 안정적인 직업 기회를 강조했다. 그는 “독일에서 일하는 인도인들은 평균적으로 독일인보다 더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어 사회·복지 기여도 크다”고 말했다.
설욕 노리는 캐나다·패권 경쟁 중국도 美 이탈 인재 확보 혈안
미국의 51번째 주로 들어오란 굴욕을 겪었던 캐나다 정부도 미국을 이탈하는 인재들을 유치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번 H-1B 비자 조치를 자국 이민 전략에 반영해 글로벌 기술 인재를 적극 흡수하겠다는 계획이다. 캐나다는 이미 밴쿠버, 토론토, 몬트리올 등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글로벌 IT 기업들의 연구개발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밴쿠버는 미국 시애틀과 가까워 아마존·MS 등 미국 대기업들이 인력 수급의 대안으로 활용해 왔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민 장벽 강화가 오히려 캐나다에 ‘두뇌 유출’ 기회로 작용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더 공격적인 정책을 내놨다. 중국 국무원에 따르면 중국은 다음 달 1일부터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인재 유치를 위한 새로운 ‘K비자’를 도입한다. 이 비자는 사전 취업 제안이나 연구직 확보 없이도 중국에 입국해 학업과 구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취업하지 않아도 입국과 거주, 취업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궈자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 및 외국인 청년 과학기술 인재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일반 비자 범주에 '청년 과학기술 인재' 비자를 신설하기로 결정했다"며 구체적인 사항은 재외공관에서 발표할 정보를 주목하라고 밝혔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K비자 소지자는 중국에 입국한 후 교육, 문화, 과학 기술 등의 분야에서 교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기업 및 비즈니스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이미 지난 8월 국무원 발표로 K비자 신설 계획을 공식화했지만, 최근 미국의 H-1B 수수료 폭등 조치로 시행을 앞두고 더욱 주목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번 조치가 “핵심 인재 유입 통로를 흔드는 자충수”라는 평가 속에, 중국이 K비자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인재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로이터는 “미국 H-1B 비자의 수수료 폭탄으로 지원자들이 대안을 찾는 상황에서, 중국의 K비자 도입은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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