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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문 닫히며 데이터 접근 차단 모든 데이터 ‘가격표’ 부착 흐름 핀테크 업계 비용·기술 부담 호소

지난 수년간 전 세계 핀테크 기업들은 소비자 금융 데이터에 자유롭게 접근해 예산 관리와 투자, 대출, 결제 서비스 등 자신들만의 서비스를 구축해 왔다. 그러나 JP모건체이스가 이 같은 생태계의 경계를 다시 그리려는 움직임에 나섰다. 제3자 데이터 접근에 대해 별도의 요금을 부과하기로 한 이번 결정은 단순히 서버 인프라에 가해지는 부담에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전통 은행들이 핀테크·암호화폐 기업과 경쟁하는 방식 자체를 재편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막 내린 무료 접근 시대
28일(이하 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는 “JP모건체이스가 핀테크 기업들의 데이터 접근에 새로운 요금제를 도입하면서, 업계 전반의 작동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 최대 은행 중 하나인 JP모건의 결정이 ‘오픈 뱅킹’이라는 이름 아래 전통적 금융과 기술 기반 혁신 기업 간 자유롭게 흐르던 데이터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는 평가다.
실제로 2010년대 중반부터 각국의 핀테크 스타트업들은 기존 은행 데이터를 활용해 예산관리와 결제, 투자, 디지털 지갑 등 다양한 서비스를 선보였다. 이 과정에서 프래이드(Plaid)와 요들리(Yodlee) 같은 데이터 중계 플랫폼들은 소비자의 동의를 받아 은행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다시 핀테크 앱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JP모건은 이러한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JP모건은 이달 초 발표한 성명에서 “데이터 중계업체들로부터의 (정보 공유) 요청이 하루 수백만 건에 이르며, 이로 인해 자사는 사이버 보안과 대역폭, 인프라 전반에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데이터 접근 업체들에 대한 요금 부과는 이 같은 운영 비용을 상쇄하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반면 업계에서는 JP모건의 조치 이면에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시각이 주를 이룬다. 소비자 금융 데이터는 이제 신용위험 분석부터 맞춤형 대출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핵심 자산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흐름에 일정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요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자산화하고 있단 분석이다. 한 핀테크 관계자는 “JP모건의 시도는 단순히 서버 비용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며 “데이터를 돈으로 보고, ‘요금소’를 세우려는 의도”라고 풀이했다.
새로운 조치가 시작된 시점 또한 절묘하단 지적이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은 암호화폐와 인공지능(AI) 기반 대출, 탈중앙 금융(DeFi)에 대한 시장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전통 금융기관들이 지배력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에 한창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행된 JP모건의 이번 조치는 전통적 금융 시스템과 새로운 금융 시스템 사이에 벽을 세우는 첫 단계로 작용할 것이란 관측이다.
프래이드와 암호화폐, 수익 구조 붕괴 위기
미국 최대 데이터 집계 업체 중 하나인 프래이드는 이와 관련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중이다. 프래이드는 JP모건이 자사 데이터를 관리할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이번 조치가 초래할 부작용에 대해서는 일부 우려를 드러냈다. 프래이드 관계자는 “데이터 접근에 요금이 부과되면, 종국에는 소비자 부담 증가와 혁신 둔화, 핀테크 생태계의 파편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융계 전반적으로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긴장이 감지됐다는 평가다. 일부 핀테크 개발자들은 일찌감치 API 구조를 조정하거나 데이터 흐름을 우회해 JP모건 서버에 가해지는 부하를 줄이는 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다른 업체들 역시 수수료를 피할 방편으로 중소 은행이나 신용조합과의 직접 제휴를 검토하고 나섰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치가 핀테크 스타트업은 물론 암호화폐 기업들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블록체인 기반 지갑과 암호화폐 플랫폼은 사용자 신원 확인, 계좌 연동, 자금 이체 등을 위해 은행 데이터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기업이 빈약한 수익 구조와 느슨한 규제 환경 속에서 JP모건 서버에 상당한 트래픽을 유발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CNBC는 익명의 JP모건 관계자를 인용해 “전통 핀테크 앱이 서버 요청을 제한하는 반면, 대다수 암호화폐 플랫폼은 사용량 가이드를 따르지 않아 시스템에 과부하를 일으키곤 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JP모건의 해법은 명확하다. 요금을 부과해 책임 있는 데이터 사용을 유도하고, 동시에 데이터 흐름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아 평판·재무·규제 리스크를 야기할 수 있는 사용자들의 접근을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금융 시장의 규제 흐름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미 금융당국이 금융 데이터의 저장과 전송, 상업적 활용 방식에 주목하는 가운데서 ‘책임 있는 데이터 운영 주체’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다만 업계에서는 여전히 우려의 목소리가 주를 이룬다. 값싼 데이터 접근에 익숙한 핀테크 기업들에게 이번 조치는 그동안 관행처럼 여겨지던 ‘자유로운 활용’이 불가능하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지는 양상이다. 자금 여력이나 기술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스타트업 특성상 API 재구축에 드는 비용과 기술 부담이 큰 탓이다. 이는 곧 애플이나 구글, JP모건 자체 앱처럼 막대한 자본을 등에 업은 사업자들은 독점적 접근을 무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림길 놓인 오픈뱅킹의 미래
JP모건의 행보를 둘러싼 논의는 요금 문제를 넘어 더 광범위한 수준으로 전개되는 형국이다. 오픈 뱅킹이라는 시스템 자체의 확장 가능성과 미래 가치를 재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다. 그간 정책 당국과 업계는 소비자 데이터 이동권을 ‘기본권’으로 간주하며 고객이 자신의 데이터를 원하는 서비스 제공자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프래이드와 같은 플랫폼은 이러한 비전을 구현하기 위한 핵심 장치였다. 그러나 JP모건의 결정은 기존 금융권 내부에서 이 흐름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유럽 등 여타 주요국과 매우 대조적인 풍경이다. 최근 유럽은 결제 서비스 지침(PSD)2 규제에 따라 은행이 인증받은 제삼자에게 고객 데이터를 무료로 제공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유럽 금융계엔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핀테크 시장이 조성됐다. 통일된 데이터 접근 규제가 없어 각 은행이 제각각의 조건을 정할 수 있는 미국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이 같은 시점에서 보면, JP모건의 결정은 규제 공백이 가져올 수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례로 정의할 수 있다. 은행들이 저마다의 벽을 세우고, 핀테크 기업은 그 벽을 넘기 위한 비용과 기술적 장벽을 감당해야 하는 식이다.
이는 다시 금융 포용이라는 사회적 과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란 비관적 전망을 낳는다. 다수의 핀테크 서비스가 금융 소외 계층을 위한 예산관리, 신용 점수 개선, 저비용 대출 등을 제공해 왔다지만, 데이터 접근 비용이 오름으로써 사용자에게 비용을 전가하거나 서비스 축소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지적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갈등은 단순한 수익 모델 충돌을 넘어 금융의 미래를 놓고 벌어지는 주도권 싸움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소규모 핀테크와 암호화폐 플랫폼들이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을 공산이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금융 데이터 공유 구조 자체가 완전히 재편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접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이며, 오늘날 글로벌 금융시장에는 ‘디지털 통행료’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