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혹한기로 드러난 韓 VC의 민낯, 전문성 없는 '묻지마 투자'로 위기 자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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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VC 17%가 깡통 투자사로 전락 회수 시장 막히고, 초기 투자도 위축 유행만 좇아 투자, 구조적 한계 봉착

국내 벤처투자 시장의 혹한기가 이어지면서 올해 상반기 벤처캐피털(VC) 다섯 곳 중 한 곳은 단 한 건도 투자하지 않은 '깡통 투자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회수 시장 위축과 자금 경색이 맞물려 신규 투자와 초기 창업 투자가 줄어들면서 VC와 벤처 생태계 전반의 악순환이 이어지지는 양상이다. 업계에서는 고금리와 경기침체 같은 외부 요인 외에도, 국내 VC의 투자 전문성과 기획력 부재 등 구조적 한계가 투자 공백의 핵심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신규 투자 없이 기존 투자 기업 생존에만 매달려
26일 한국벤처투자협회 전자공시시스템(DIV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투자 실적이 ‘0원’인 VC는 총 61곳으로 집계됐다. 전체 등록 벤처투자회사 355곳 중 약 17%가 사실상 깡통 투자사로 전락한 셈이다. 깡통 투자사의 수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2022년 32곳에서 2023년 41곳, 2024년 43곳으로 늘었으며, 올해 상반기 들어 급증세가 두드러졌다. 최근에는 고금리와 경기침체가 맞물려 과거 실적이 탄탄한 대형 VC에만 자금이 집중되면서 신생 VC는 등록 자격을 잃거나 청산 등으로 시장에서 퇴출당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투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깡통 투자사의 증가는 초기 창업 시장 경색으로 이어지고 있다. 벤처투자 플랫폼 더브이씨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처투자는 445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37.6% 감소했다. 같은 기간 투자금은 26.9% 줄어든 2조2,403억원으로 집계됐다. 신규 투자기업 수는 569개로 5년 평균(858개)을 크게 밑돌았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 투자가 크게 위축됐다. 올해 상반기 초기 투자는 338건, 투자금은 7,442억원으로 각각 42.9%, 33.4% 감소했다. 중기 스타트업 투자 역시 건수와 금액이 각각 26.1%, 32% 줄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전문가 사이에서는 기업공개(IPO)·인수합병(M&A) 등 회수 시장이 막히자, VC가 신규 투자를 꺼리고 기존 투자 기업의 생존에만 매달리는 등 시장 전체가 악화일로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IPO 상장예비심사 청구 기업은 53곳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88곳) 대비 39.7% 급감했다. IPO뿐 아니라 M&A까지 막히면서 사실상 자금 회수의 길이 끊겼다. 상장이 예상됐던 케이뱅크, DN솔루션즈, 롯데글로벌로지스 등 주요 기업마저 상장을 철회하자 '이제 출구가 없다'는 절망감이 업계에 팽배하다.
대형 투자 필수인 바이오 산업, 신규 투자 40%↓
특히 대형 투자가 필수인 바이오 산업의 타격이 크다. 국내 바이오의약품 시장은 최근 5년간 연평균 18.4% 성장했고, 글로벌 메가딜급 M&A와 대형 VC 투자가 이어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임상 기반 기술을 보유한 바이오 기업들이 잇달아 자금 유치에 실패하면서 국내 바이오 산업 전반에 '구조적 투자 절벽'이 형성되고 있다. 올해 들어 IPO 및 후속 투자 시장이 크게 위축되면서 1분기 바이오 분야 스타트업의 VC 신규 유치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40% 감소했고 신약·헬스케어 기업 상당수가 기술특례상장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AI 산업은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일부 생성형 AI와 플랫폼 기업에 데카콘급 투자가 몰리는 반면, 대다수 스타트업은 파일럿 단계에서 투자가 끊겨 사업 중단에 내몰렸다. 실제 올해 1분기 VC 자금의 38%가 AI·플랫폼 기업에 집중됐지만, 정작 고도화 ·상용화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중소·중견 기업은 투자 불발로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다. 반도체업계 역시 팹리스와 설계 전문 스타트업이 자금난으로 핵심 기술 개발이 중단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최근에는 외국계 자본 이탈까지 겹쳐 국내 기술 생태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컨슈머테크 분야는 투자 기업 비중이 30%에 이르지만, 경기침체와 VC 자금 경색으로 브랜드 신규 런칭이나 유통망 확대가 크게 둔화됐다. 패션·뷰티 등 생활 소비재는 비교적 선방하고 있으나, 대형 자본을 유치하지 못한 신생 브랜드는 성장동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투자 기업 비중이 20%에 달하는 소프트웨어 분야도 개발 인력 감축과 신규 서비스 지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드웨어·플랫폼 혁신을 뒷받침할 미디어·콘텐츠, 게임, 프롭테크 등의 투자 비중이 한 자릿수에 머물며 침체가 심화되고 있다는 현장 평가가 나온다.

韓 VC, 수동적·소극적 구조와 기획력 부재 한계
벤처업계에서는 지금의 투자 혹한기가 단순히 금리 인상이나 글로벌 경기 침체 탓으로만 돌리기 어렵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그간 한국 VC업계가 보여온 투자 역량 부족과 전문성 부재, 책임 회피가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실제 이들은 지난 몇 년간 유동성 파티에 취해 제대로 된 기술 검증이나 사업성 평가 없이 특정 분야에 '묻지마 투자'를 이어왔다. 수년간 ‘따라가기 투자’와 ‘대기업 쏠림 투자’에만 매달린 결과, 기술과 시장을 이해하고 선제적으로 투자할 역량을 쌓지 못했고 그 후과가 오늘날의 참담한 투자 공백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이다.
이처럼 위험을 회피하는 구조 탓에 한때 업계에서는 "투자할 기업이 없다"는 푸념이 이어졌다. 하지만 국내 VC의 병폐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이는 VC 스스로 기획 능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미국의 선진형 VC 모델은 이미 기술을 바탕으로 한 '컴퍼니 빌딩(Company Building)' 중심으로 전환돼 있다. 기술이 있으면 창업자를 발굴하고, 경영 인력을 구성해 회사를 설립한 뒤 시드 투자와 구조 설계를 직접 담당하는 방식이다. 반면 국내 VC는 여전히 ‘누군가 준비해 놓은 회사’를 찾는 수동적 구조에 머물러 있다.
이에 업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다수의 VC가 스타트업의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화려한 스펙이나 유행 키워드에 베팅을 했다는 지적이다. 국내 VC 상당수는 AI·데이터·바이오 등 첨단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심사역이 부족하다 보니, 투자 검토 과정에서도 리스크 회피, 대기업과의 연계성, 단기 엑시트 가능성만을 따지는 경우가 흔하다. 이로 인해 독창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기술 잠재력을 지닌 혁신 기업은 외면당하고, 반대로 실적을 부풀리는 데 능한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으는 기형적 시스템이 굳어졌다.
일례로 지난해 자율주행 스타트업 18곳에 4,000억원의 자금이 투입됐지만, 이 중 상당수는 제대로 된 기술 검증조차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공유 전동 킥보드 시장에서는 올룰로의 성공 이후 수많은 스타트업이 우후죽순 뛰어들었고, 차별화 없는 사업 모델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됐으나 대다수 업체가 폐업했다. 반면, 시장성과 성장 잠재력을 입증한 스타트업은 외면당했다. 뷰티·헬스케어 예약 플랫폼 라이픽은 출시 직후 10만 다운로드, 1만4,000여 제휴 매장을 확보하며 가능성을 입증했지만, 후속 투자를 확보하지 못해 2년 만에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