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에 공장 없으면 100% 과세” 韓 반도체업계 ‘비상’
입력
수정
반도체 고율 관세 지속 언급하는 트럼프 "지분 내놔라", "더 투자해라" 압박 국내 기업들 “美 시장 불확실성 커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입맛에 맞는 투자안을 제시한 국가에만 자동차 품목 관세를 인하하면서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한국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 관세까지 무기 삼아 휘두르며 '불도저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 반도체 기업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분 매입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엄포를 놓다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을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프로그램에서 제외하더니, 이제는 다시 100% 관세율 카드를 꺼내든 모양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동맹국 가릴 것 없이 글로벌 반도체 회사를 압박하는 동시에 미국 내 추가 투자를 이끌어내겠다는 심산으로 풀이된다.
미국 내 가동 약속 어기면 소급 벌칙 검토
18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16일 영국 국빈 방문을 위해 백악관을 나서면서 반도체 품목 관세에 대해 언급했다. 자동차보다 수익성이 좋은 반도체의 경우 관세를 보다 더 높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동차 관세를 타협해 25%에서 15%로 낮추면 미국 자동차 업체에 피해를 준다는 우려가 있다'는 질문에 "반도체는 더 낼 수 있다"며 "반도체 이익률이 (자동차보다) 더 높다"고 말했다.
실제 로이터 소식통에 의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내 공장을 운영하지 않거나 가동 약속을 지키지 않은 해외 반도체 업체에 최대 100% 수입 관세를 물리는 방안을 살피고 있다. 관세 대상은 국내 생산 기반이 전혀 없는 기업으로 한정되며, 약속 위반 시 소급적용 벌칙을 추가하는 것까지 검토 중이다. 이 방안이 시행되면 공장이 없는 외국 반도체 기업은 100% 관세를 내야 한다. 반도체 자급률이 낮은 미국은 해외 업체 의존도가 높아, 국내 팹 설치를 서두르지 않은 기업에는 막대한 비용 부담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현재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오스틴 팹 증설을, SK하이닉스는 신규 팹 건설을 발표했지만, 미 정부는 두 회사가 제시한 투자 계획의 ‘실행 의지’를 따져보는 중이다. 이와 관련해 미 현지 증권업계 관계자는 “삼성·SK하이닉스가 투자 시점과 규모, 자금 조달 방안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관세 면제 자격을 보장받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격주로 트럼프 '말 폭탄', 반도체 불확실성 확대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초에도 반도체에 대한 100%의 품목 관세 부과 방침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그는 “해외에서 온 반도체에 대해서 100% 관세를 부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가 “미국 내 생산하거나 생산 계획이 있는 기업에는 관세를 면제해 줄 것”이라 예외 규정을 달았다. 이에 미국 내 공장을 건설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한숨을 돌렸지만, 지난달 19일에는 다시 보조금을 볼모로 기업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미국 정부는 자국의 반도체 기업인 인텔에 보조금을 주는 대가로 지분 10%를 인수키로 했는데, 이와 동일한 형식으로 보조금을 지분 취득 형식으로 지급하는 방안을 거론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해외 반도체 기업들이 반발할 여지가 보이자 미 정부는 “대미 투자 확대를 약속한 기업은 지분 요구 대상에서 제외할 것”이라고 다시 단서를 붙였다.
이후 우리 정부는 양국 정상회담에서 조선 분야 및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전략 산업에 투자할 3,500억 달러(약 488조원)의 대미 투자 펀드 조성하겠다면서 미국 측에 ‘선물’을 안겨줬으나, 그럼에도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미국의 압박은 이어졌다. 지난달 29일 미국 상무국 산업안보국(BIS)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법인을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승인 목록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앞으로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을 줄이라는 압박으로 해석됐다.
이에 따라 앞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법인은 오는 12월 31일부터 중국 현지 공장에 미국산 반도체 장비를 들일 때마다 건별로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삼성전자의 중국 시안 공장은 전체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약 40%를, SK하이닉스의 우시 공장은 전체 D램의 40%·다롄 공장은 낸드플래시의 30%를 담당하고 있는 만큼 생산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인텔 등 美 기업은 유리
이는 철저하게 미국과 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한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한 테크업계 관계자는 “경영난에 시달리던 인텔을 살리기 위해 미 정부가 인텔 대주주가 되면서 미국 테크 기업 물량을 인텔에 밀어주려는 것”이라며 “삼성전자나 TSMC 등 해외 반도체 기업들이 지분을 내놓지 않을 것을 미리 알기 때문에 추가 투자 압박용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미 언론은 트럼 행정부가 인텔 지분을 인수하면서 인텔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사업을 지속한다는 뜻을 비췄다고 보도했다. 데이브 진스너 인텔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미 정부는 우리가 파운드리를 분리해 누군가에게 매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AI칩 최강자인 엔비디아가 인텔에 50억 달러(약 7조원) 규모의 지분투자에 나선 것도 반도체 공급망의 미국 중심 재편으로 분석된다. 로이터에 따르면 19일 엔비디아는 인텔 보통주를 주당 23.28달러에 매입하기로 했다. 이는 전날 종가(24.90달러)보다 낮지만 지난달 미국 정부가 인텔 지분 10%를 취득하며 지급한 주당 20.47달러보다는 높은 금액이다. 이번 투자를 통해 엔비디아는 인텔 지분 4% 이상을 보유하며 주요 주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계약에는 ‘인텔 부활’의 핵심이라고 평가받는 파운드리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만약 추후에라도 파운드리 계약을 하게 되면 파운드리 경쟁이 더 격화되고, 한국 기업들과 TSMC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엔비디아의 핵심 생산 파트너인 TSMC는 인텔을 고객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커지고, 삼성전자 입장에서도 파운드리 점유율 확대 기회가 줄어든다. 지금도 TSMC와 경쟁을 하고 있는데, 인텔이 제3의 대형 경쟁자로 부상하면 고객 확보 전쟁이 더 치열해질 수 있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