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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제은행(BIS)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기준금리 인상이 시작됐던 2021년 3분기부터 지난해 4분기까지 국내 가계·기업부채가 총 4,458조원에서 4,833조원으로 8.4% 증가했다. 전체 국내총생산(GDP)인 2,162조원보다 2.2배 많은 빚이 민간에 누적된 것이다. 이에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았다가 고금리, 고물가 등으로 경기 회복이 지연되면서 빚을 갚지 못하고 채무조정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폭증하고 있다.
채무조정 신청 건수 급증
15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양정숙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채무조정 신청 건수는 상반기 기준 9만1,981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13만8,202명의 80%에 달하는 수치다. 이와 더불어 30일 이하 연체자들이 신청하는 신속채무조정 신청자 수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상반기 기준 신청자 수는 총 2만1,348명으로 지난해 전체 신청자 수인 2만1,930명과 맞먹는다.
빚을 상환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늘었다. 차주들의 평균 변제 기간은 6월 말 기준 100.5개월로, 지난 2018년 기준 84.6개월보다 15.9개월 증가했다. 부채의 질 역시 좋지 않다. BIS 데이터에 의하면 3개 이상 금융기관에서 빚을 진 다중채무자이면서 동시에 소득 하위 30%인 국내 저소득층 취약 차주가 전체 차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올해 1분기 기준 6.3%다.
문제는 취약차주의 1인당 대출 잔액이 2022년 1분기 7,495만원에서 올해 1분기 7,582만원으로 87만원 증가했지만, 올해 1분기 전체 가계대출 잔액은 전년 동기 대비 24조6,000억원 감소했다는 사실이다. 기준금리 인상과 부동산 경기 부진 등 영향으로 전체 대출은 줄어들었으나 취약차주의 빚은 오히려 늘어난 셈이다.
차주들의 최후의 보루, 채무조정제도
채무조정제도란 현재의 소득으로 채무를 정상적으로 상환하기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상환 기간 연장, 이자율 조정, 채무 감면 등 상환 조건을 변경해 과다 채무자의 재기를 지원하는 제도다. 공적제도로는 법원에서 결정하는 ▲개인회생 ▲파산 등이 있으며, 사적 제도로는 신용회복위원회가 운영하는 ▲신속채무조정 ▲프리워크아웃 ▲개인워크아웃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신속채무조정은 연체 30일 이하일 경우에 적용된다. 일시적으로 돈을 갚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며, 원금은 감면되지 않지만 연체 이자를 감면받을 수 있다. 연체한 지 30일 이상 90일 미만일 경우에는 프리워크아웃을 신청할 수 있다. 이는 일시적으로 재정이 어려울 뿐 조기상환이 가능하거나 장기간 분할 상환을 원할 경우 유리하다. 역시 원금은 감면되지 않지만 이자는 감면받을 수 있으며, 감면율은 상환능력에 따라 약정이자율의 30~80% 수준인 3.25~8% 사이로 결정된다. 만일 90일 이상 연체했다면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해야 한다. 채무조정 이후 장기간 분할 상환이 가능하며, 연체 이자와 원금 이자뿐만 아니라 원금도 최대 70%까지 감면받을 수 있다. 다만 개인워크아웃의 경우 공공기록이 남아 개인신용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빚지고 사회생활 시작하는 2030세대, 고금리 저축銀 소액 대출도 증가
한편 채무조정 건수 자체의 증가보다도 30대 이하 청년들의 채무조정 신청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6월 윤영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신용회복위원회의 채무조정 신청 현황을 분석한 결과 2020년에 비해 2030대의 신청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밝혔다. 29세 이하 채무조정 신청 비중은 2020년 11%에서 2023년 1분기 13%까지 확대됐으며, 30대 역시 2022년 22%에서 2023년 1분기 23%로 증가했다. 심지어 30대 이하 다중채무자도 증가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8년 3분기 약 132만 명이던 30대 이하 다중채무자는 코로나19를 지나며 2021년 3분기 약 136만 명, 2022년 3분기 약 139만 명으로 증가했다.
법정 최고 금리에 달하는 고금리에도 불구하고 저축은행에서 ‘소액 신용대출’을 받는 이들도 늘어났다. 경기 침체에 돈줄이 막힌 중·저신용자들과 막 사회생활에 나선 2030세대들이 신용도 부족으로 제1금융권 대출이 어려워지자 급전 마련을 위해 저축은행을 찾은 것이다. 저축은행 업계는 2019년 9,003억원이던 소액 신용대출 규모가 2020년 8,811억원, 2021년 8,989억원을 기록하다 지난해 1조133억원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양 의원은 “올해 상반기 기준 소액 대출 신청자는 지난해 4만4,671명의 절반이 넘는 2만3,264명”이라며 “문제는 성실 상환자들의 소액 대출 신청이 늘면서 연체율이 동반 상승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2018년 6.7%에 머무르던 소액 대출 연체율이 2022년에는 10.5%, 올해 6월 말에는 10.9%로 훌쩍 뛰었다. 저축은행 연체율 역시 지난해 말 5.89%에서 올해 1분기 6.95%로 1%P 이상 늘어났다.
업계 전문가들은 불경기가 해소될 뚜렷한 변수가 없는 한, 중·저신용자들의 급전 창구 역할을 하는 소액신용대출의 문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연체율 부담이 커지고 조달 비용이 높아져, 법정 최고 금리인 20% 이내에서는 저축은행의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이미 일부 저축은행에서는 지난해 말과 비교해 올해 1분기 소액 신용대출 규모를 줄였다.
이에 양 의원은 "소액대출이 늘어나고 있고, 연체율이 3배 이상 치솟은 데다 변제기간이 100개월을 넘어선다는 것은 우리 경제가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며 "신용회복을 위해 분투하는 서민들과 자영업자들을 위해 정부는 특단의 지원대책 마련을 적극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