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중국 당국이 연기금, 보험사, 대형은행 등 금융 기관들에 주식 투자를 확대할 것을 지시했다. 과거에도 중국 당국은 자국 경제의 유동성 축소 우려로 증시 폭락 조짐이 보이자 연기금을 투입해 증시를 끌어올린 바 있다.
그러나 이번 민간자금의 탈중국 움직임은 중국 부동산발 디폴트 리스크에서부터 비롯된 장기 침체 우려에서 촉발된 만큼 '언 발의 오줌 누기' 식으로는 자국 증시를 되살리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와 관련 우리나라 연기금 또한 증시 폭락을 막기 위해 '구원 투수'로 국내 주식을 대거 매수한 바 있으나 민간 자금을 국내로 끌어오지 못해 결국 대규모 적자를 봐야만 했다.
중국 금융당국, 민간 기업들에 자국 주식 투자 활성화 요청
24일(현지 시간) 외신 보도에 따르면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는 이날 금융업계 간 세미나를 통해 장기 펀드를 운용하는 이들 기업 경영진에게 자국 주식 투자를 활성화해 줄 것을 촉구했다. 또한 이를 3년 이상의 장기 평가 시스템을 통해 모니터링하겠다고 발표했다.
중국 정부는 자국 부동산 업계 연쇄 디폴트(채무불이행) 리스크 및 미국의 대중국 제재가 맞물린 경기 침체 공포로 금융시장에서 글로벌 유동성이 빠져나가자 시장 안정을 위한 조치를 연이어 내놓고 있다. 지난 18일 증권관리위원회는 증시 지원책으로 주식 거래 수수료를 인하하기로 했고,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을 지원해 투자자들이 자국 증시에 매력을 느낄 수 있게끔 조처했다.
아울러 앞서 중국 금융당국은 비구이위안으로부터 촉발된 중국 부동산 시장 침체 우려가 불거졌던 16일, 자국 내 자산운용사들에 주식 순매도 금지령을 내려 증시 폭락을 막고자 했다. 또한 중국 인민은행은 기준금리로 통용되는 1년 만기 대출우대금리(LPR)를 인하하는 한편 위안화 고시 환율을 평가절상하며 자국 유동성은 끌어모으면서도 위안화 방어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중국 당국의 조치에도 불구, 투자자들은 일련의 부양책들이 경기를 회복시키고 증시를 끌어올리기에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고 중국 시장에서 자금을 빼가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23일까지 13일 동안 중국 본토 시장에서 총 107억 달러(약 14조1,800억원)의 해외 자금이 유출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로 인해 상하이종합지수는 이달 들어 6.3% 떨어졌다. 선전종합시도 8.3% 하락했다. 블룸버그는 해당 수치가 이달 들어 전 세계 주요 지수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이라고 밝혔다.
자국 증시 폭락의 '구원투수' 격인 연기금
중국 정부 주도의 이같은 자국 주가 방어 움직임은 과거에도 취해진 바 있다. 지난 2021년 3월 중국 증시는 유동성 축소 우려로 급격한 하락세를 기록했는데, 이때도 중국 국부펀드가 대대적으로 개입해 주가 방어에 성공했다.
당시 중국 인민은행(중앙은행)은 실물 경제에 뿌려진 과도한 유동성이 거시 레버리지 비율 악화 및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 통화 완화 정책의 출구 전략에 시동을 걸겠다고 공표한 바 있다. 특히 당시 1분기 인민은행 통화정책회의록에서 금융 당국은 그간 통화 완화 정책의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통화정책의 연속성, 안정성, 지속성 유지', '경제 회복에 대한 지원책 유지' 등의 표현이 삭제됐으며, 이에 따라 신중한 통화정책 기조를 취할 것이란 기대가 시장에 퍼졌다.
이로 인해 중국 경제에 유동성이 축소될 것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대거 증시에서 발을 뺐고, 증시 폭락을 막기 위해 중국 정부는 연기금으로 하여금 자국 기업 주식을 적극적으로 매입하도록 지시해 민간 자금이 증시에 재진입하도록 도왔다. 실제 중국 국부펀드가 증시에 개입했다고 알려진 2021년 3월 10일 오전(현지 시간) 0.7% 하락했던 홍콩 항셍지수는 상승 국면으로 전환해 장 중 한때 상승 폭을 1.4%까지 확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달러·위안화 환율도 이날 0.45% 올랐고, 중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도 3.26%로 하락 폭을 줄였다.
주가 방어 위해 투입됐으나, 덩달아 손실 입은 우리나라 국민연금
이와 비슷하게 우리나라의 연기금 중 최대 투자 주체인 국민연금도 그간 자국 증시 폭락 과정에서 하방 경직성을 제공해 왔다. 그러나 이같은 '구원 등판'이 연이은 기금 운용의 손실로 이어지자 최근 들어선 국민연금이 포트폴리오 내 국내 주식 비중을 크게 줄이고 있는 모양새다. 실제 국민연금의 연간 기준 지난해 11월 말까지의 손실액은 48조원에 육박하며 이 중 절반을 국내 주식시장에서 날린 것으로 집계됐다. 또한 이마저도 주식 비중을 크게 줄이고 있는 와중에 발생한 손실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일각에선 더 이상 연기금이 주가 방어에 투입될 일이 과거처럼 빈번하지 않을 것이란 예측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특히 지난해 9월엔 국내 증시가 연일 급락세를 기록하며 코스피 2,200선이 무너졌음에도 연기금은 끝내 지수 방어에 나서지 않은 데다 되레 주식 순매도세를 이어간 바 있다. 당년도 2월에는 국내 주식을 192억원 순매수한 데다 4월엔 4,656억원 규모로 순매수에 나서는 등 연기금이 국내 주식에 대해 낙관적이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부터는 코스피가 2,700선에서 2,150선으로 추락하는 과정에서 연기금도 매도세를 이어가면서 국내 증시 하락세에 힘을 보탰다.
이같은 매도세는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주식 보유 비중은 나날이 '홀쭉'해지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따르면 현재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보유 비중은 2023년 5월 말 기준 14.9%로, 3년 평균치인 17.6%를 약 4%포인트 밑도는 수준이다. 기금 운용본부는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리스크 관리를 우선순위로 둔다는 입장이지만, 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선 그간 지수 방어를 위해 구원 투수로 나섰다가 '피를 본' 국민연금이 더 이상 국내 증시를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중국 금융당국의 조치가 자국 국부펀드들로 하여금 우리나라 연기금과 비슷한 수순을 밟게 할 것이란 예측을 내놓는다. 중국 연기금 또한 증시 폭락을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막아보려다가 크게 피해를 보고 주식 시장에서 한 발짝 물러난 우리나라 국민연금의 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중국의 과거 정부 주도의 '증시 되살리기'가 먹혀들어 갔던 것은 일시적인 유동성 축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중국의 민간 자금 이탈 현상은 중국 부동산발 디폴트 리스크로 인해 촉발된 장기 경기 침체 우려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단순한 긴급 유동성 공급 조치로 해결될 사안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