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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신탁 운용에 불법 거래 자행한 증권사들, KB·하나증권 영업정지 처분
금융위는 자본시장법 개정안 입법 예고, 증권업계 돌려막기 관행 직격
DLF 관리 부실로 홍역 겪었던 하나은행, 함영주 회장 징계는 취소 수순
채권형 랩어카운트·특정금전신탁(랩·신탁)을 운용하면서 불법 거래를 자행한 하나증권이 당초 예상보다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됐다. 지나친 미스매치 전략 등에 발목을 잡힌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 당국은 추후 여타 증권사에 대해서도 제재를 이어갈 방침이다. 이번에 제재가 확정된 하나증권, KB증권 외 7개 증권사에 대한 비위가 이미 적발된 상황인 만큼, 향후 제재는 빠른 속도로 이뤄질 전망이다.
금감원, 랩·신탁 돌려막기 하나·KB증권 제재
12일 금융 당국에 따르면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위원회(제재심)는 지난달 27일 랩·신탁 불법 자전거래(돌려막기) 관행과 관련해 하나증권과 KB증권의 제재 조치안을 의결했다. 당초 알려진 제재 내용은 영업정지 3개월 정도였으나, 금감원은 하나증권에 대해 영업정지 6개월 처분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기관 제재는 기관주의-기관경고-시정명령-영업정지-등록·인가 취소 등 5단계로 이뤄진다. 기관주의만 경징계고, 기관경고부터는 중징계로 분류된다. 하나증권과 KB증권 모두 중징계를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하나증권은 더 강한 제재를 받았다는 의미다.
랩·신탁은 증권사가 일대일 계약을 통해 고객 자산을 운용하는 금융 상품으로, 일대일 계약을 통해 진행되는 만큼 펀드와 달리 고객의 투자 목적 및 자금 수요 등에 따라 개별 운용된다는 특징이 있다. 만기는 통상 3~6개월로 짧은 편이며, 이 때문에 법인 고객이 단기자금을 활용할 때 종종 랩·신탁을 찾는다.
하나증권은 이런 랩·신탁에 만기 10년 채권과 같은 장기 상품을 담아 문제가 됐다. 채권을 사고팔아 이익을 얻고 3~6개월 후 고객에게 자금을 돌려줘야 하는 랩·신탁에 그보다 만기가 20배 이상 긴 채권을 편입한 것이다. 채권은 만기가 길수록 수익률도 높기 때문에 이익 극대화를 위해 미스매칭 전략을 사용한 것으로 풀이되지만, 시장 상황이 악화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2022년 하반기 레고랜드발 채무불이행 사태가 발생하면서 국내 채권 시장이 얼어붙으며 미스매칭의 부작용이 터져 나온 탓이다.
랩·신탁 계좌에 담긴 채권이 팔리지 않아 계좌 만기에도 고객에게 자금을 돌려줄 수 없게 된 증권사들은 목표 수익률을 달성하기 위해 돌려막기를 시작했다. 계좌 만기를 먼저 맞이한 고객의 채권을 다른 고객 계좌에서 비싸게 사는 방식이다. 금감원에 따르면 A증권사는 한 고객의 만기가 도래하자 이 고객 계좌에 담긴 기업어음(CP)을 B 증권사에 시가보다 1억2,000만원 높게 매도했다. 이후 B증권이 가진 CP를 타 고객 계좌에서 1억2,000만원 비싸게 되샀다. 다른 증권사까지 동원해 자사 고객의 CP를 돌린 것이다.
여타 7개 증권사도 제재 초읽기, 불건전 관행 뿌리 뽑을 듯
이번에 하나증권과 KB증권에 대한 중징계가 확정되면서 아직 제재심에 오르지 않은 나머지 증권사들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금감원이 검사한 한국투자증권, 유진투자증권, SK증권, 교보증권, 키움증권, NH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 등 증권사들도 크고 작은 비위를 적발당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다른 증권사에 대한 제재심을 차례로 열 계획이다. 최종 징계 수위는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를 거쳐 확정된다. 하나증권과 KB증권에서 행위마다 제재 기준이 결정된 만큼 나머지 7개 증권사의 제재심은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증권업계에선 하나증권처럼 예상보다 높은 수준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데 불안감을 표출했다. 특히 하나증권의 징계 수위가 기존 3개월에서 두 배 늘어난 사유가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 불안을 키운다. 시장에선 하나증권이 다른 증권사보다도 만기가 긴 채권을 담은 게 원인일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제 상대적으로 짧은 3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는 데 그친 KB증권의 랩·신탁에 담긴 채권 만기는 하나증권보다 짧은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채권형 랩·신탁 돌려막기는 업계 관행"이라며 영업정지 처분은 지나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금감원은 강력한 제재 조치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모든 증권사가 '관행'을 따른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채권형 랩·신탁 돌려막기, 만기 불일치 운용 같은 것들은 계속 문제가 돼 온 부분”이라며 “내부적으로 다 점검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 증권사는 (돌려막기를)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제재심에 오르지 않은 증권사 중 하나·KB증권보다 더 심각한 불법 행위를 저지른 곳이 있다는 점도 금감원의 제재 조치에 불을 지필 전망이다. 금융 당국에 따르면 한 증권사는 외부위탁운용관리(OCIO) 자금을 동원해 고객의 채권을 비싼 가격에 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금융투자업자는 원칙적으로 투자자에게 일정한 이익을 사후에 제공해선 안 된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어긴 것이다.
이 같은 증권업계의 불건전 운용 행태가 거듭 드러나면서, 시장에선 증권사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당국 역시 소비자 보호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히며 증권사를 압박하고 나섰다. 지난 3월 금융위가 입법 예고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랩·신탁을 통해 만기 미스매치 투자를 하려면 고객의 사전동의를 받아야 하며, 랩·신탁 계약을 체결하는 금융투자업자는 리스크 관리 기준을 의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기준안엔 ▲고객으로부터 동의받은 만기를 준수해 투자할 것 ▲금리 등 시장 상황 변동이 있는 경우 랩·신탁 계약 기간보다 만기가 긴 금융투자상품을 교체하는 등 투자자 손실 최소화 장치를 포함할 것 등 내용이 담겼다. 자본시장법 개정안과 하나·KB증권 중징계 등 일련의 과정에 증권업계 내 불건전 관행을 뿌리 뽑겠다는 당국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나은행도 영업정지 경험, 연달아 터진 징계 리스크
이번에 중징계를 받은 하나금융은 지난 2020년에도 관리 부실 등 문제로 홍역을 겪은 바 있다. 당시 직접 처분을 받은 건 하나금융의 은행 계열사 하나은행이었다. 2020년 3월 금융위는 하나은행에 ‘업무 일부 정지(사모펀드 신규 판매 업무) 6개월’ 처분을 내렸다. 과태료는 167억8,000만원을 부과하기로 의결됐으며,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 장경훈 전 하나은행 부행장은 각각 문책경고와 정직 3개월을 받았다. 국외금리 연계 파생결합증권(DLF) 손실 사태의 책임을 물은 결과다.
DLF는 금리·환율·신용등급 등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파생결합증권(DLS)에 투자하는 펀드다. 해당 상품은 금리가 만기까지 일정 구간에 있으면 연 3.5~4%의 수익률을 보장하지만, 일정 구간 아래로 내려가면 손실 구간에 진입하며 최악의 경우 원금을 모두 잃게 된다. 당시 DLF 상품에 논란이 불거진 건 금리가 예상했던 방향과 다르게 움직인 탓이다. 2018년까지만 해도 시장금리는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금리는 거꾸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보니 시중에 판매된 DLF 상품 상당수가 손실 구간으로 진입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DLF 판매 잔액은 8,224억원이었으며, 손실률은 쿠폰금리를 포함해 최대 98.1%에 달했다.
더 큰 문제는 은행들의 불완전판매였다. 금감원의 조사에 따르면 은행들은 1분간 전화 통화를 하면서 고위험 상품인 DLF를 판매하거나 노후자금을 정기예금에 예치하려던 75세 고령자를 DLF로 유치하는 등 불완전판매를 자행해 왔다. 당국이 함 회장과 장 전 부행장 등 경영진에 중징계를 가한 것도 불완전판매에 대한 내부통제 실패 책임을 묻겠단 취지였다.
다만 최근 법원은 함 회장이 당국으로부터 받은 징계를 취소해 달라며 낸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나은행에 대한 영업정지 6개월 처분은 적법하지만 함 회장에 대한 징계 처분은 과도했다는 것이다. 특히 1심 법원은 함 회장이 '내부통제 기준 마련 의무' 10개 중 7개를 위반했다고 봤으나, 2심은 2개의 의무 위반만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1심에서 인정된) 수 개의 징계사유 중 일부만 인정돼 재량권 행사의 기초가 되는 사실인정에 오류가 있다”며 "함 회장이 금융당국으로부터 받은 징계 처분은 취소돼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판단이 남긴 했지만 연달아 발생한 징계 리스크가 일정 부분이나마 해소됐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