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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CPU 제왕 군림했지만 기술 경쟁력 잃고 실적 부진
2분기 대규모 적자 등 극심한 경영난, 고강도 구조조정 돌입
WSJ "美 퀄컴, 인텔에 인수 제안했지만 규제당국 심사 난관"
한때 '반도체 제왕'으로 불렸던 인텔이 극심한 운영난을 겪는 가운데, 퀄컴이 인텔 인수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팻 겔싱어(Pat Gelsinger) 인텔 최고경영자(CEO) 취임 후 ‘2030년 세계 2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부진 장기화에 창립 이래 처음 인수합병(M&A) 매물로 나와 충격을 주는 모습이다. 다만 인텔이 퀄컴의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반독점 조사 대상으로 규제당국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만큼 실제 성사될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퀄컴, 인텔 인수 성사 땐 역대 최대 규모 합병
20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최근 반도체 기업 퀄컴이 재정 위기에 처한 인텔에 매수 제안을 건넸다고 보도했다. 20일 기준 퀄컴의 시가총액은 1,880억 달러(약 250조원)로 931억9,100만 달러(약 125조원) 규모의 인텔에 2배에 달한다.
이 거래가 성사될 경우 수년간 테크업계에서 이뤄진 M&A 중 역대급 규모로 기록될 전망이다. 또한 퀄컴은 인텔 인수를 통해 기존에 강세를 보여온 모바일뿐 아니라 개인용 컴퓨터(PC)와 서버용 반도체까지 사업 품목으로 편입하면서 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다만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통신용 칩 등의 분야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 퀄컴이 세계 1위의 중앙처리장치(CPU) 제조업체인 인텔을 인수하는 데는 엄격한 반독점 심사가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인텔 인수를 강행할 경우 퀄컴은 반독점 제재를 피하기 위해 퀄컴이나 인텔의 일부 자산을 매각해야 할 가능성도 있다. WSJ은 "양자 간 거래가 실제 성사될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퀄컴의 인수설은 인텔이 창립 이래 처음으로 인수 대상으로 거론됐다는 점 그 자체로 56년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평가했다.
경쟁 기업인 퀄컴과 인텔은 AI가 촉발한 반도체 붐에 바이든 행정부에서 부활한 '메이드 인 USA' 기조가 더해지면서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올해 초 양사는 구글과 연합해 AI 반도체 시장의 90%를 점유한 엔비디아의 독주를 막기 위한 동맹을 조성하고 AI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오픈 소프트웨어 구축에 나서기도 했다. 또 인텔이 파운드리 재도전을 선언하자 퀄컴은 수율이 확인되기도 전에 최첨단 파운드리 공정으로 자사의 반도체 제조를 맡기며 인텔의 경영 전략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최근 인텔 파운드리에서 퀄컴 칩을 제조하는 테스트 과정 중 문제가 발생해 결국 주문 제작을 중단한 상태다.
알테라·모빌아이 등 실패한 M&A로 재정 누수
동맹 관계였던 퀄컴이 인수 제안에 나선 배경에는 인텔의 경영난과 재정 위기가 있다. 인텔은 한때 PC CPU를 중심으로 반도체 업종의 제왕으로 군림했지만, 최근 기술 경쟁력에서 뒤처지며 실적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분기에는 16억 달러(약 2조1,000억원)라는 역대급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인텔은 대규모 적자의 원인으로 지목된 파운드리 사업부를 분사하기로 하고 독일, 폴란드 등에서 추진 중인 공장 건설도 중단했다. 또 전체 직원의 15%에 달하는 1만5,000명 감축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나서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 2015년 프로그래머블 통신칩 회사 알테라를 인수하면서 만든 사업조직의 매각도 추진하기로 했다. 당초 인텔은 알테라를 상장해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었지만 기업공개(IPO)에 소요되는 시간 등을 고려해 매각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문제는 인텔이 9년 전 알테라를 인수할 당시 쓴 비용이 무려 18조5,000억원에 이른다는 점이다. 이는 인텔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로 당시에도 가격 거품 논란이 제기됐다. 하지만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인텔의 사정을 고려할 때 외부 매각으로 과거 투자금을 온전히 회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알테라 인수 이후에도 M&A 거품 논란이 이어졌다. 인텔은 알테라 인수 후 2년 뒤인 2017년 3월 비슷한 규모로 자율주행 기업 모빌아이 인수에 나섰다. 이 합병에도 18조원이 넘는 153억 달러를 써내면서 2년 새 두 기업을 인수하는 데 총 320억 달러를 지출했다. 하지만 모빌아이의 인수도 사실상 실패했다. 인수 후 5년이 경과한 2022년 10월 모빌아이는 나스닥에 상장됐는데 당초 시가총액은 240억 달러로 인텔이 기대한 500억 달러대에 현저히 못 미쳤다. 현재 모빌아이 주가는 시총은 111억 달러로 상장 당시 시총보다 더 줄어들었다.
파운드리 재진출, 막대한 시설투자 등이 패착
전문가들은 이러한 위기의 원인으로 시대적 변화를 파악하지 못한 전략적 실패를 꼽는다. 한때 업계를 군림했던 인텔이 2000년대 중반 이후 모바일 반도체 수요를 놓쳤다는 것이다. 실제 인텔은 지난 2017년 챗GPT 개발사 오픈AI 지분을 확보할 기회가 있었지만, 생성형 AI가 출시돼도 투자금을 회수할 수 없다고 판단해 투자하지 않기로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에 대한 투자보다는 재정적 성과에 몰입한 경영 전략도 문제였다. 2010년대 인텔은 엔지니어들에게 기술 역량보다는 원가 절감과 효율화, 단기 성과를 강조했다. PC 산업의 성장률이 꺾인 2016년에는 1만2,000여 명을 해고했고 인텔에서 쫓겨난 엔지니어들은 경쟁사로 자리를 옮겼다. 삼성전자나 TSMC가 7나노 공정에 공을 들일 때 인텔은 14나노 공정에 머물러 있었고, 2021년 인텔이 10나노 공정에서 양산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많은 고객을 잃은 뒤였다.
이에 결국 인텔은 주요 반도체 분야에서 후발주자로 전락했다. 모바일 칩 분야에서는 영국 반도체 설계기업 암(Arm)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고, AI 칩의 기본이 되는 그래픽처리장치(GPU)는 엔비디아가 일찌감치 앞서가며 2위권의 추격을 따돌리고 있다. 핵심사업으로 자신했던 CPU 부문도 경쟁사인 AMD에 추격을 허용했다. AMD의 시가총액은 2,145억 달러(약 283조원) 수준으로 인텔의 2배에 육박한다. 반면 인텔은 올해 들어 주가가 55%나 하락했다. 이에 2024년 다우존스지수 편입 종목 중 가장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해당 지수 구성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기술력이 뒤쳐진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파운드리에 주력한 것도 패착이란 평가가 많다. 2021년 겔싱어 CEO는 취임 직후 반도체 왕국 재건과 함께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했다. 2030년 삼성전자를 제치고 업계 2위로 올라선다는 목표하에 미국에만 1,000억 달러(약 132조원)를 들여 제조시설을 건설하고, 대당 5,000억원이 넘는 EUV 노광장비를 사들였다. 하지만 역량이 분산되면서 오히려 주력 사업인 CPU마저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막대한 투자가 이어지면서 재정 적자도 심화했다. 올해 상반기 파운드리 사업부의 누적적자는 53억 달러(약 7조원)로 최소 2~3년은 적자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