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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푸틴, 우라늄 등 전략 원자재 수출 제한 언급 러 원전기업, 對美 우라늄 수출 재개 가능성 시사 미·러 간 이익 맞물려 전면 수입·수출금지 어려워
미국이 러시아산 우라늄의 수입을 금지한 데 이어 러시아 정부도 대미 수출 금지로 맞불을 놓으면서 원자력 발전의 핵심 에너지원인 농축 우라늄에 대한 '공급망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 다만 전 세계 주요국에서 러시아산 우라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미 정부는 전면적인 수입 금지 조치 대신 유예나 예외 조항을 둬 물량 확보의 길을 열어두고 있다. 러시아도 우라늄을 정부 재정 확보를 위한 주요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국영기업의 수출 경로를 확보하는 등 애매한 제재를 이어가고 있다.
푸틴, 바이든 '보복 조치'로 우라늄 對美 수출 차단
2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의 농축 우라늄 대미 수출 금지 조치를 두고 미국과 러시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15일(현지 시각)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농축 우라늄의 대미 수출을 일시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 5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러시아산 우라늄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한 것에 대한 맞대응 조치로 지난 9월 푸틴 대통령이 정부 회의에서 "서방은 우리에게 많은 상품 공급을 제한하고 있다"며 "우라늄, 티타늄, 니켈 등 전략 원자재 수출을 제한하는 방안을 고려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러시아 정부는 "이번 수출 금지 조치는 2024년부터 2027년까지 러시아 우라늄 제품 수입을 부분적으로 제한한 미 행정부의 결정에 대한 보복"이라며 "2028년부터 전면 금지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해당 조치의 적용에 있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하겠다고 부연하며 예외적으로 2027년까지 선적을 허용하는 면제 조항을 뒀다. 이날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러시아의 이익에 부합하는 경우 연방 기술·수출 통제국은 미국을 금지 목록에서 제외할 수 있다"며 "우리의 이익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며칠 후 세계 최대 농축 우라늄 공급업체인 러시아의 국영 원전기업 로사톰은 미국에 대한 우라늄 수출 재개 가능성을 시사하며 진화에 나섰다. 18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로사톰은 성명을 통해 "러시아 정부의 대미 우라늄 수출 제한은 미 당국의 조치에 대해 예상할 수 있었던 상호 대응"이라며 "대미 공급을 허용하는 특별한 라이선스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라늄 제품의 공급은 고객과 합의한 조건과 해당 법률 및 규정을 준수해 변함없이 계속된다"고 밝했다. 러시아가 당장 미국에 대한 우라늄 수출을 끊지는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바이든, 러시아 자금줄 차단 위해 우라늄 수입 금지
우라늄을 두고 촉발된 양국의 갈등은 올해 5월부터 시작됐다. 지난 5월 13일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산 우라늄의 미국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H.R.1042)에 공식 서명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러시아나 러시아 기업이 생산하는 저농축 우라늄의 미국 수입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다. 이 법안은 지난해 12월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에서 수개월 간 발목이 잡혀있다가 법안 처리를 가로막아온 공화당의 테드 크루즈(텍사스) 상원의원이 지난달 반대 의견을 철회하면서 만장일치로 상원 문턱을 넘었다.
러시아산 우라늄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는 90일의 유예기간을 두고 지난 8월부터 발효됐다. 다만 러시아산 우라늄 공급 중단으로 원자로 운행을 불가능한 경우에는 2028년까지 법 적용을 유예한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미국의 수입 금지 조처가 '자승자박'이라며 비판했다. 스푸트니크 통신에 따르면 아나톨리 안토노프 주미 러시아 대사는 "미국의 수입 금지 조치는 러시아보다 미국에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라며 "미국의 자체 농축 능력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제재 조치는 자국 경제에 해를 끼쳐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미 행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2022년 3월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등의 수입을 금지하는 제재를 가했지만, 우라늄은 제재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러시아가 미국 내 93개 상업용 원자로에 사용하는 농축 우라늄의 20%를 공급하는 상황에서 수입을 금지하면 원전 운영에 차질이 발생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미국 핵 연료 수입의 35%를 러시아에서 들여오고 있으며 우라늄 수입을 위해 미국이 러시아에 지급하는 돈은 연간 10억 달러(약 1조3,700억원) 내외로 추산된다.
미국은 미·소 냉전 종식 직후인 1993년 '메가톤을 메가와트로(Megatons to Megawatts)'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러시아 핵탄두에 장전돼 있던 고농축 우라늄을 민간 발전용 저농축 핵연료로 전환해 수입한 것을 계기로 러시아산 우라늄에 상당부분 의존해 왔다. WP는 "저렴한 러시아산 우라늄과 경쟁하면서 미국과 유럽 기업이 경쟁력을 잃었고, 미국내 자체 우라늄 농축 능력도 부족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수입 제한 규정이 발효된 8월 이후 미국이 러시아에서 우라늄을 수입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S&P글로벌에 따르면 미 에너지부는 자국의 원자력 발전기업 컨스틸레이션과 우라늄 농축기업 센트러스 등에 러시아산 우라늄 수입 허가를 내 준 것으로 알려줬다.
러시아 우라늄 의존도 높은 美·EU, 원전 독립 선언
업계에서는 최근 러시아산 우라늄을 두고 이어진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이 수입·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완전한 절연'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양국 모두 특별허가 등의 예외 조항을 둬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뒀다는 것이다. 미국은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위해 원자력 의존도를 높이는 상황에서 당장 러시아산 농축 우라늄에서 손을 떼면 자국 원전 업계의 연료가 부족해지는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러시아로서는 농축 우라늄 수출이 정부 재정의 주요 재원이다. 해외 판매량을 유지해야 푸틴 대통령의 통치력이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부터 미국 정부를 두고 '이중 플레이' 논란이 제기됐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해 국제 사회에 강력한 제재 동참을 강조해 온 미국이 오히려 러시아에 자금을 대주는 꼴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난 2022년 4월 바이든 대통령은 값싼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늘린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특히 미국에 값싼 농축 우라늄을 수출하는 로사톰이 러시아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 논란을 키웠다. 로사톰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빼앗은 유럽 최대 규모의 자포리자 원전을 운영하는 업체다.
이러한 딜레마는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미국이 핵연료 공급망에서 러시아 의존도를 줄이려 해도 다른 국가들로 인해 러시아 수출에 타격을 입히기 어렵다. 일례로 왕립연합군사연구소(RUSI)에 따르면 전체 전력의 70%를 원자력발전으로 생산하는 프랑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러시아산 농축 우라늄 수입 가치와 물량이 크게 증가했고 현재까지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는 원자로 총 56기를 가동하기 위해서 연평균 약 8,000톤의 천연우라늄이 필요한데 이를 전적으로 해외 공급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해 올해초부터 서방 주요국들은 러시아로부터 '우라늄 독립'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캐나다·프랑스·일본·영국이 우라늄 농축∙변환 능력 확대에 총 42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한 데 이어 올해 3월 원자력 정상회의에서 우르졸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원전 르네상스'를 언급하며 원전 가동을 위한 청정 에너지원의 자체 운용 역량을 강조했다. 지난 5월에는 바이든 대통령은 "27억2,000만 달러의 전례없는 연방정부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미국 내 새로운 우라늄 농축 능력을 가동케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