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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집행위 차원에서 대미 강경 대응 권고 캐나다도 디지털세 부과 앞두고 갑론을박 인도, WTO에 보복 관세 부과 가능성 통보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나선 주요국들이 강경 대응 기조로 전환하며 유리한 조건을 관철시키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집행위원회 차원에서 보복 관세 카드를 적극 검토하고 있으며, 인도는 세계무역기구(WTO)에 미국에 대한 보복 조치 가능성을 공식 통보했다. 캐나다는 디지털서비스세(DST) 부과에 따른 갈등 끝에 일시 후퇴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최근 협상을 재개했다. 이런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미국 행정부는 상호 관세 유예 시한의 연장 가능성을 시사하며, 무역 협상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EU 회원국들 "美와의 협상에서 보복 대응 필요"
29일(현지 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24일 뵈른 자이베르트 EU 집행위원회 비서실장은 지난달 캐나다 카나나스키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직후 EU 대사들에게 전한 메시지에서 "상호관세 등 무역협상에서 강경한 대응이 미국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EU와의 관세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다음 달 9일까지 협상을 타결하지 못하면 5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이미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해 50%, 자동차에 대해선 25% 관세를 적용하고 있다.
FT는 "자이베르트 비서실장은 미국산 제품 약 950억 유로어치에 보복 관세를 매기자는 제안에 회원국의 지지를 요청했고, 미국 빅테크 기업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미국 기업이 EU 공공 입찰 참여를 제한하는 조치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EU 집행위 측은 균형 있는 협상을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지렛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EU 협상단은 미국이 관세를 전면 철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철강·자동차, 나아가 반도체·의약품에 대한 추가 관세를 줄이는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 EU 내부에서도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강경 기조의 '보복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EU 집행위 대변인은 "미국과의 공정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효과적인 보복 위협을 유지하자는 것이 우리의 방침"이라고 밝혔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도 지난달 24일 독일 하원 연설에서 "미국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다양한 수단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며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지킬 수 있고,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캐나다, 트럼프 보복 예고에 디지털세 부과 철회
이웃 나라 캐나다 역시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캐나다는 구글, 아마존, 애플, 메타 등 미국 빅테크가 자국에서 얻는 디지털 서비스 매출에 대해 3%의 세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초 DST는 연 매출 7억5,000만 유로 이상, 캐나다 내 디지털 매출 2,000만 캐나다달러 초과 기업을 대상으로 2022년 매출까지 소급 적용될 예정이었다. 이를 두고 미 연방정부와 주요 빅테크들은 해당 세금이 서비스 비용을 증가시킨다며 반발했고, 캐나다 내부에서도 미국의 보복 가능성을 우려하는 반대 여론이 제기됐다.
첫 세금 부과를 사흘 앞둔 지난달 27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플랫폼인 트루스 소셜에 올린 글에서 “캐나다가 EU를 따라 했다”면서 "DST 부과는 터무니없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 극단적인 세금에 따라 우리는 캐나다와의 모든 무역 협상을 즉시 종료한다”며 “앞으로 7일 이내에 캐나다가 미국과 교역을 할 때 적용받을 관세율을 통보할 예정”이라고 경고했다. 캐나다의 조치가 미국 기업을 부당하게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한 강경 대응을 시사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발언 직후 캐나다 경제의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캐나다달러는 0.5% 넘게 떨어졌고 주요 주가지수도 요동쳤다. 이에 캐나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DST 도입 계획을 전격 철회하면서 미국과의 무역협상을 재개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29일 저녁 성명을 통해 “오늘 발표는 이달 캐나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설정한 7월 21일까지의 협상 시한을 이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무역협상 재개를 공식화했다. 그는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美 재무장관, '상호관세 유예' 연장 가능성 시사
인도와의 무역 협상은 장기 교착 상태에 빠졌다. FT는 지난 27일 "인도는 당초 미국과의 조기 협정 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현재는 신중한 낙관론으로 전환했다"며 "단순 합의보다는 좋은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게 인도의 새로운 입장"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피유시 고얄 인도 상공부 장관도 "인도는 경제적 또는 전략적 이익을 저해하는 어떤 합의에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며 "공정하고 공평하며 균형 잡힌 결과를 얻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초기, 보복 관세를 부과하지 않을 것이라던 기본 입장에도 변화의 조짐이 감지됐다. 최근 인도 정부가 "미국의 철강 및 알루미늄 관세와 자동차 관세는 세이프가드 조치(긴급수입제한조치)"라며 "우리도 보복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세계무역기구(WTO)에 통보한 것은 기존 입장이 달라지고 있다는 관측을 뒷받침한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러한 인도의 움직임을 두고 "트럼프 행정부에 취한 첫 번째 보복 조치"라고 해석했다.
이처럼 전 세계 주요국이 각자 보복 수단을 꺼내 들며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려 하자, 미국 내에서는 상호관세 유예 시한을 당초 오는 8일에서 연장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27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현재 18개 핵심 교역국과의 무역 협상에 집중하고 있으며 노동절인 9월 1일까지 10여 국과 협상을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베선트 장관은 핵심 협상국이 어느 나라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국·일본·대만·베트남 등 미국의 상위 교역국들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전날에는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이 브리핑에서 상호관세 유예 시한 연장 여부에 관한 질문에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며 "다만 해당 사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내릴 결정"이라고 전했다. 스티븐 마이런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도 “선의로 협상에 임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유예 조치가 연장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지난 5월 영국과 첫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어 대만, 인도네시아 등 일부 국가가 합의에 근접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한국을 비롯해 주요 교역 대상인 EU, 일본 등과의 협상에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