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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CB 발행 이어가는 中 기업들 美 상장 막히자 역외 CB 발행으로 활로 찾아 힘 잃은 中 은행들, CB는 생존 위한 '탈출구'?
중국·대만 기업들이 올해 역대 최대 수준의 전환사채(CB)를 발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금 조달 비용을 줄이고 해외 현금 잔고를 늘리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中 기업 CB 발행량 최고치
28일(현지시간) 씨티그룹에 따르면 중국·대만 기업들은 올해 초부터 총 188억 달러(약 26조2,500억원) 규모의 CB 및 교환사채(EB)를 발행했다. 이는 이전 최고 기록인 2021년 187억 달러(약 26조원)를 웃도는 수준이다. CB는 해당 기업 주가가 특정 금액을 넘기면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채권을 말한다. EB 역시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채권이지만 발행회사 주식이 아닌 타 회사 주식으로도 전환할 수 있다.
중국 전자상거래기업 알리바바는 지난 5월 사상 최대 규모인 50억 달러(약 6조9,800억원)의 CB를 발행했다. 중국 최대보험사 핑안도 지난 7월 35억 달러(약 4조8,850억원) 규모의 CB를 시장에 내놨다. 중국 바이오기업인 우시앱텍, 노트북 제조사인 콴타컴퓨터, 대만 위탁생산업체인 폭스콘 등은 올해 쿠폰 금리가 0%인 CB를 총 22억 달러(약 3조원)어치 발행하기도 했다.
중국·대만 기업들이 자금 조달 방식으로 CB를 택하는 것은 낮은 조달 비용 때문이다. 롭 찬 씨티그룹 아태지역 주식 연계발행 책임자는 "기존 달러 채권 대비 CB를 통해 최대 4%포인트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보호무역·불법 이민자 추방 등 정책으로 고금리 상황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은 현시점에 CB는 매력적인 자금 조달 수단이 될 수 있다.
美 증시 상장 대신 CB 발행
일각에서는 미·중 갈등이 중국 기업들의 CB 열풍에 불을 붙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과 중국 간 정치적 긴장으로 미국 주식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좁아지자, 다수의 중국 기업이 CB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는 평가다.
금융정보업체 딜로직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 기업은 2014년 알리바바의 대흥행 이래 미국 증시에서 750억 달러(약 104조6,67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미·중 갈등이 본격화한 이후 미국 주식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이 기업공개(IPO)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경로는 거의 차단된 상태다. 지난 2021년에는 차량호출 기업 디디추싱(DIDI·滴滴出行)이 뉴욕 증시 상장을 강행했다가 중국 당국의 대대적인 규제에 부딪혀 이듬해 상장폐지 절차를 밟기도 했다.
미국 증시 입성을 통한 자금 확보가 어려워진 가운데, 미국 등 역외 시장에서의 CB 발행은 중국 기업이 손쉽게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수단으로 급부상했다. 이와 관련해 한 시장 관계자는 "중국 증시가 침체기에 접어든 만큼, 현지 상장을 통한 자금 확보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공격적인 CB 발행은 미국 증시 상장을 대체하기 위한 일종의 '우회로'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주가 희석 우려할 때 아냐"
중국 기업들의 CB 발행 물량이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시장에서는 기업들의 이 같은 선택이 일종의 '생존 전략'이라는 평가도 제기된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CB 물량 증가에 대한 반발 여론이 강했다. 기업들의 CB 물량이 늘어나면 잠재적으로 주가를 짓누를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특히 중국 증시는 CB 발행 기업의 주가가 발행 시점보다 많이 하락하면 추후 전환가액도 낮추는 경향이 있다. 이는 여타 국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관습으로, 주식 가치를 희석하는 효과를 낸다.
다만 최근 중국의 경기 침체로 생존 위기에 맞닥뜨린 기업들이 급증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주가 희석 등을 우려할 때가 아니다"라며 "중국에서는 당장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 기업들의 자금 조달에 난항을 겪는 것은 주요 은행들이 줄줄이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며 "CB 발행으로 은행의 빈자리를 메꿀 수 있다면 그게 최선책"이라고 짚었다.
실제 지난 몇 년 동안 중국 경제를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해 온 중국공상은행과 중국은행 등은 현재 기록적으로 낮은 마진, 수익 감소, 대손충당금 증가 등 각종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 은행은 중국 은행 시스템 전반을 이끄는 6대 국유은행(공상은행, 건설은행, 중국은행, 농업은행, 교통은행, 우정저축은행)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