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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조작 한번으로도 증시 퇴출 원칙 확립 지급정지·과징금·거래제한명령 등 제재 적극 활용 상장폐지 제도개선 통해 부실 상장사 적시 퇴출도

금융당국이 금융감독원 부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주가조작 근절 합동대응단’을 한국거래소에 설치하기로 했다. 주가 조작과 같은 불공정거래를 빠르게 포착하기 위해 34명 규모의 대규모 통합 조직을 구성하고 관련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 한국거래소는 계좌가 아니라 개인을 직접 들여다봐 주가 조작을 감시하기로 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불공정거래 행위를 엄단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한국판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설립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분위기다.
합동대응단 설치·AI 감시체계 도입
9일 금융위원회와 금감원, 한국거래소 등은 서울 여의도 거래소 서울사무소에서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근절 실천방안'을 발표하고 주가조작 근절 합동대응단을 이달 중 가동한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11일 한국거래소를 찾아 자본시장의 불공정거래를 근절하기 위해 시스템 개선과 조직·인력 확충을 주문한 데 따른 후속조치다. 관계 기관은 지난 한 달 동안 5차례 집중회의를 열고 이번 방안을 마련했다.
핵심은 34명 규모의 주가조작 근절 합동대응단 신설이다. 현재 불공정거래 대응체계는 심리(거래소), 조사(금융위·원) 기능이 기관별로 분산돼 있어 긴급 사건 대응이 지연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금융위·금감원·거래소는 거래소 내 한 공간에 상주하며 조사·심리 등을 동시에 진행하는 합동 대응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거래소 감시체계도 전면 개편된다. 기존 '계좌 기반' 감시에서 '개인 기반' 감시 체계로 전환된다. 금융당국은 가명 처리된 주민등록번호와 계좌 식별정보를 연계해 동일인을 식별하고 시세 관여율·자전거래 여부 등을 파악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시장 감시시스템에 인공지능(AI) 기술을 도입해 불공정거래 행위의 혐의 판단 지표를 정교화하고, 지능화된 불공정기법에 실시간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예정이다.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해서는 고강도 조치가 이뤄진다. 특히 조사 단계에서 혐의 계좌가 발견될 경우 즉시 지급정지 절차를 밟아 범죄수익을 차단한다. 여기에 부당이익의 최대 2배까지 과징금을 부과하고, 중대 불공정거래 행위에 연루된 대주주·경영진 등은 적극적으로 대외 공표할 방침이다. 부실기업의 신속한 퇴출도 추진된다. 시가총액·매출액 등 상장 유지 요건을 국제표준에 맞게 상향하고, 2년 연속 감사 의견 미달 시 즉시 상장 폐지된다. 현재 3심제로 운영 중인 코스닥 상장사 퇴출 심사 단계는 2단계로 축소한다.
금융당국은 고의로 회계 분식을 저지른 대주주·경영진에 대해서는 '패가망신'에 준하는 수준의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 개선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이윤수 금융위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은 "주가조작하다 걸리면 사실상 패가망신한다는 인식이 형성되도록 해 '원스트라이크 아웃' 원칙을 철저히 적용하겠다"며 "최근 강력하고 다양한 행정제재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된 만큼 조만간 대응단을 중심으로 적용사례가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증권 범죄 관련 기소권 부여하는 방안 검토해야
업계에서는 이번 합동대응단 출범으로 시장감시·조사·제재 등 분산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주가조작 사건 대응에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다만 합동대응단은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인 만큼 불공정거래 대응 역량을 키우려면 한국판 SEC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SEC는 미국 자본시장 관리 감독권을 총괄하는 독립 기관이다.
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불공정거래를 엄단하겠다는 신정부의 의지를 분명히 한 점은 인정할 만한 부분이나 유효성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불공정거래는 아무리 협업을 잘한다 하더라도 여러 기관 간 이해관계가 달라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정 기관이 주도권을 갖고 일관되게 정책을 수행하는 한국판 SEC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도 "미국 SEC는 기소권이 있기에 강력한 기관"이라며 "지금은 (금융당국이) 검찰에 사건 이첩만 가능한데 수사가 잘 이뤄지지 않거나 형사처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매우 적다. 한국판 SEC에 증권 범죄 관련 기소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제조사 권한 가진 SEC, 범죄 강력 대응
SEC의 인력·조직이나 권한은 한국의 금융당국과 자주 비교선상에 오른다. 국내 주가조작 범죄를 빠르게 적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국내 금융당국의 구조적 문제가 손꼽히기 때문이다. 먼저 주가조작 등 불공정거래 조사를 하는 인력 규모에서 격차가 크다. 금감원의 불공정거래 조사 인력은 100명 내외인 반면 SEC의 불공정거래 조사인력은 1,400명에 이른다. 인구·경제 규모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큰 격차가 있는 셈이다.
조직 구성도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는 금융위와 금감원으로 당국이 분리돼 있다. 조사 인력·특별사법경찰 등 관련 인력이 금융위·금감원에 뿔뿔이 흩어져 있고, 조사 권한·범위도 제각각이다. 지난 2023년 4월 라덕연 주가조작 사태 당시 금융당국의 늑장대응, 엇박자 논란이 불거졌던 것도 이 같은 이원화된 구조 때문이다.
이에 반해 1934년 증권거래법에 근거해 설립된 SEC는 증권법상의 불공정거래에 대한 조사·제재를 일괄적으로 관할하고 있다. 1972년부터는 기존에 각 부처에서 각기 맡았던 조사집행 권한을 SEC의 집행국(Division of Enforcement)으로 통합했다. 2017년부터 집행국에 블록체인 관련 위반 사항 등을 조사하는 사이버특수부도 신설됐다. 무엇보다 SEC는 막강한 권한에 따라 증권 관련 범죄에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량에 따른 임의조사, 증인소환 등 강제조사를 할 수 있어서다.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혐의를 받는 계좌에 대한 동결, 증권범죄 일당의 휴대폰 통화 내역 조회도 가능하다. 이는 한국 금융당국에는 없는 권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