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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창업주 일가, 연대에서 대립으로
증가세 거듭하는 경영권 분쟁 관련 소송
경영권 방어 제도 촉구하는 목소리도
새해 주주총회 시즌이 다가오면서 시장에 긴장감이 감도는 모습이다. 기업의 실적이 예상을 밑돌거나, 경영 방식에 이견이 생기는 경우 주주와 경영진 간 다툼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일부 사모펀드는 대주주로서 기업의 주요 임원을 교체할 것을 촉구하는 등 경영권 분쟁의 중심에 섰다. 오랜 시간 재벌 기업과의 유대를 형성해 온 사모펀드의 역사와는 상반된 행보다.
일부 행동주의 펀드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적대적 인수합병(M&A)을 금융시장 전면으로 끌고 나온 대표적 사례는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다.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는 2023년에는 한국앤컴퍼니(옛 한국타이어) 경영권 분쟁에 개입한 바 있으며, 지난해엔 고려아연 공개매수 시도에 나섰다. 시장에서는 MBK를 비롯한 사모펀드 운용사들이 더 이상 재무적투자자(FI)로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창업주 일가 지분 낮아지며 외부 세력 경영권 위협 커져
3일 업계에 따르면 고려아연은 오는 23일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14명 이사 선임의 건’과 ‘집행임원제도 도입을 위한 정관 일부 개정의 건’을 의안으로 다룰 예정이다. 이들 안건을 제시한 MBK는 “기존 최대 주주인 영풍과 손을 잡은 만큼 적대적 M&A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그간 상대편인 최윤범 회장 측이 이사회를 이끌며 경영을 도맡아 왔다는 점에서 적대적 M&A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려아연과 MBK의 경영권 분쟁은 시장 최대의 관심사다. 경영권이 창업주 1·2세대에서 3·4세로 승계되는 과정에서 대주주 중심의 지배구조가 취약해진 기업이 다수인 탓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온 영미권 기업들은 창업주 일가의 지분율이 경영권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지만, 한국 기업들의 사정은 이와 다르다. 10~20%대 낮은 지분율로 기업을 경영해 온 이들 창업주 일가는 사모펀드를 비롯한 외부 세력의 경영권 위협을 걱정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금융감독원에 의하면 지난해 10월 말까지 경영권 분쟁과 관련한 소송은 242건에 달한다. 2021년 185건, 2022년 175건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증가한 수치다. 2023년에는 이런 소송이 266건으로 정점을 찍기도 했다. 모든 소송에 사모펀드가 개입된 것은 아니지만, 단순 지분 투자한 기업까지 고려하면 경영권 분쟁의 근원지라는 평가 또한 무리는 아니다.
국내 사모펀드 시장은 2004년 제도 도입된 이후 설정액 기준 341배 성장을 기록하며 2023년 말 기준 136조원 규모까지 성장했다. 도입 초기에는 주로 중소기업 중심으로 자본을 제공해 성장에 기여하는 역할을 했으나, 최근에는 대형 상장사 경영권 인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시장 내 존재감을 확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최대 주주 지분율이 낮아 2대 주주와의 격차가 크지 않은 기업들에서 경영권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마켓인사이트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시가총액 3,000억원 이상 국내 상장사 479곳 중 최대 주주 지분율이 33% 미만인 기업은 212곳이다. 통상 최대 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이 3분의 1 미만이면 경영권이 취약하다고 평가된다. 여타 주주들이 규합해 주주총회에서 특별 결의 사안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 주주와 2대 주주의 지분율 격차가 작은 대표적 기업으로는 엔씨소프트를 꼽을 수 있다. 엔씨소프트는 최대 주주인 김택진 대표가 지분 11.9%를,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PIF가 9.3%를, 넷마블이 8.9%를 보유 중이다. PIF와 넷마블은 전략적 지분 투자라고 선을 긋고 있지만, 대주주 지분율이 현저히 낮은 현 상황에선 언제든 적대적 M&A에 노출될 위험 있다는 게 업계 전반의 평가다. 엔씨소프트 외에도 현대엘리베이터, 녹십자홀딩스, 금호석유화학, 한국카본, 아세아, 아난티 등이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회사 정관 내 경영권 방어 조항 실효성 낮아
이렇다 보니 기업들은 지배구조 취약성 해결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일례로 범삼성가 기업인 한솔케미칼은 몇 년 전부터 지배구조의 취약성 해결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해 왔다. 2세 조동혁 회장과 3세 조연주 부회장 등 대주주 지분율이 15%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2015년에는 최대 주주 지위를 KB자산운용에 잠시 내준 적도 있었다. 현재 조 부회장 측은 전략적 시너지가 예상되는 이차전지 업체와 접촉해 지분을 맞교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 가치 훼손을 막기 위한 경영권 방어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높아지는 추세다.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경영권 방어 수단을 마련해 두면, M&A가 더 많은 순기능을 발휘할 것이라는 게 이들 기업인의 공통된 주장이다. 이 때문에 일부 기업에서는 회사 정관으로 경영권 방어 조항을 두고 있기도 하다. 이른바 ‘황금낙하산’, ‘초다수의결제’ 등이다.
황금낙하산은 인수 대상 기업의 경영진이 M&A로 임기 전에 물러나야 할 경우 거액의 퇴직금 및 상여금을 지급하도록 해 적대적 M&A를 견제하는 방법이다. 다만 해당 조항은 회사의 재무건전성을 저해할 수 있자는 점과 이사의 충실의무를 위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손해배상소송의 여지가 있다. 특정 안건의 주주총회 결의 기준을 높게 규정하는 초다수의결제 또한 상법상의 요건보다 엄격하게 기준을 정할 경우 무효라는 판례가 있어 실효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과 일본 등 주요국에서는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차등의결권 제도’, ‘신주인수선택권’ 등을 주고 있다. 차등의결권은 의결권을 주당 0.5에서 1,000에 이르기까지 차등적으로 부여하는 제도로, 이 경우 지배주주나 경영진은 상대적으로 적은 지분율로도 경영권을 지켜낼 수 있다. 우리 상법에선 주식 1주당 1의결권이 원칙이다.
신주인수선택권은 기존 주주에게 할인된 가격으로 대규모 신주를 발행해 M&A를 시도하는 기업의 지분율을 낮춰 인수를 막는 방법이다. 인수 측면에서 보면 독약 처방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에서 ‘포이즌필(Poison pill)’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한 재계 관계자는 “경영권이 안정적으로 확보돼야 기업도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며 경영권 방어 수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산업계 성장 둔화에 우량 투자처 고갈
일각에서는 사모펀드의 공격적 행보를 두고 우리 금융시장이 일정 수준의 성숙기에 접어든 신호로 풀이했다. 과거와 달리 풍부한 자금력과 네트워크를 갖추게 된 만큼 굳이 기업의 우군으로만 남지 않아도 된다는 계산이 깔렸을 것이란 해석이다. 실제로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사모펀드의 드라이파우더는 37조5,000억원에 달하며 전년 동기 대비 33.0%(9조3,000억원) 증가했다. 드라이파우더는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받았지만, 아직 집행하지 못한 자금을 뜻한다.
반면 우량 투자처가 많지 않은 산업계의 성장 둔화를 의미하는 것이란 부정적 시각도 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투자금을 소진해야 하는 사모펀드의 고민이 행동주의 전략으로 분출됐다는 것이다. 특히 MBK는 뚜렷한 철학보다는 투자처 고갈에 따른 대안적 행보로 적대적 M&A에 나섰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최근 고려아연과의 분쟁에서는 영풍, 과거 한국앤컴퍼니와의 분쟁에서는 조현식 전 고문 등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앞세웠지만, 그 이면에서는 기존 지배주주의 한쪽 편에 서는 구도를 피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최근 금융당국이 금융 자본의 산업 지배를 예의주시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금감원은 지난달 12일 국내외 주요 사모펀드 운용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모아 간담회를 열고 금융시장 내 사모펀드의 바람직한 역할과 책임, 건전한 성장방안 등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함용일 금감원 부원장은 “사모펀드의 목적이 비교적 단기 수익에 집중된 탓에 자칫 기업의 장기 성장 동력을 훼손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한다”며 최근 시장의 화두로 떠오른 일부 사모펀드의 경영권 분쟁 참여와 관련해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