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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테일 총괄·디자인 수장에 외국인 선임 꾸준한 인재 영입에도 뚜렷한 성과 없어 겉으론 최고 직장, 속으론 보신주의 심화

삼성전자가 적극적인 외부 인사 영입으로 혁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전문성을 갖춘 인재 영입과 내부 인선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박차를 가한다는 구상이다. 다만 경직된 삼성전자 특유의 조직문화가 전문 인력의 역량을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 또한 거세 그 성과를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여기에 리더십 공백을 메우기 위한 퇴직 임원들의 복귀 또한 속속 이뤄지고 있어 혁신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란 게 재계의 중론이다.
유통 및 디자인 부문 글로벌 전문가 영입
11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4일 소피아 황-주디에쉬가 소피아 황-주디에쉬(Sophia Hwang-Judiesch) 전 타미힐피거 북미 대표를 리테일 전략 부문 글로벌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캐나다 최대 백화점 체인인 허드슨스베이, 영미권 뷰티 소매업체 울타뷰티, 타미힐피거 등을 거친 황 신임 부사장은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 유통 전문가로 불린다.
황 신임 부사장은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기업 중 하나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며 “내 뿌리로 돌아갈 기회를 주는 회사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며 삼성전자와의 동행에 기대를 드러냈다. 업계는 그가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 부문 내 주요 제품의 북미 판로 확대를 총괄하는 업무를 맡을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는 이에 앞서 이달 1일에도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마우로 포르치니를 DX 부문 최고디자인책임자(CDO)로 임명한 바 있다. 필립스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경력을 시작한 뒤 3M, 펩시코에서 CDO를 지낸 포르치니 신임 CDO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삼성전자 디자인 수장 자리에 앉게 됐다.
재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외부 인사 영입으로 혁신에 속도를 내는 것이란 시각이 주를 이룬다. ‘인재 우선주의’를 강조한 이재용 회장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해석이다. 이 회장은 지난달 임원 대상 세미나에서 영상 메시지를 통해 “경영진보다 더 훌륭한 특급 인재를 국적과 성별을 불문하고 모셔 와야 한다”며 “필요하면 인사 또한 수시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가 고(故) 한종희 대표이사 부회장의 별세로 인한 리더십 공백 해소에 분주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삼성전자는 노태문 모바일경험(MX) 부문장을 한 전 부회장의 후임으로 인선했다. 주력 사업인 반도체 실적 부진 속 스마트폰과 TV, 가전 등 세트 사업마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만큼 서둘러 내부 조직을 다지겠다는 의도다.
이 회장도 위기 극복의 전면에 나섰다. 미국의 상호 관세 예고 등 경영 불확실성이 이어지는 만큼 글로벌 공급망을 점검하고 시장 확대를 위한 협력 강화가 절실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회장은 최근 중국 방문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글로벌 최고경영자(CEO) 면담 자리에 참석하는 등 사법리스크로 멈춰있던 글로벌 경영에 적극 나서고 있다.

경직된 조직문화에 역량 펼칠 기회 줄어
다만 이처럼 적극적인 혁신 의지에도 재계에서는 삼성전자 특유의 조직문화가 혁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주를 이룬다. 심화한 관료주의, 위기관리 리더십 부재, 상의하달식 중앙집권적 통제, 대내외 소통능력 저하 등 고질적 문제들이 있는 한, 외부 인사 영입은 기대한 만큼의 성과로 이어지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이는 삼성전자가 지난 2011년 영입한 산업 디자이너 크리스 뱅글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계 3대 디자이너로 불리던 뱅글은 삼성전자 입사 후 세탁기 등 생활가전 디자인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의 손을 거친 제품은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일부 판매되는 데 그치면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뱅글은 3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삼성전자를 떠났다. 현재 그는 샤오미 전기차 디자이너로 활약하며 다시 한 번 전 세계에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일각에선 삼성전자가 성공 체험에 몰두해 과거의 경영 방식에 매여 있다는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강동우 글로벌시너지어소시에이츠 대표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들은 사업이 안정권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이 들면, 좀처럼 경영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섣불리 다른 길을 선택해 실패하지 않으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규모가 작은 회사라면 실패해도 손실이 한정적이지만 기업이 커질수록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고 부연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경영 컨설턴트 로버트 레버링이 제안한 개념인 GWP(Great Work Place)를 오래전부터 도입해 임직원을 대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 왔지만, 이마저도 역효과만 내고 있다. 조직문화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 매년 산출되는 삼성문화지수(Samsung Culture Index)가 리더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면서 점수 산출이 일종의 인기투표처럼 변질한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보신주의 조직문화가 자리 잡았다는 게 내부 구성원들의 주된 평가다.
높은 이직률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삼성전자의 이직률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계 최대 경쟁사인 대만의 TSMC와 비교해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내부 관계자는 “예전에는 성과를 낸 직원에게 확실한 보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분위기조차 찾아볼 수 없다”면서 “외부에서 인재를 데려와도 경직된 조직문화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 최고의 직장’ 순위에서 2020년부터 4년 연록 1위를 기록한 삼성전자는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1위)와 구글의 모기업 알파벳(2위)에 밀려 3위로 내려왔다.

인재 부족 심화에 올드맨 재등판도, 혁신까지 ‘먼 길’
주목할 만한 점은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속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룹 컨트롤타워를 새롭게 재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발간한 연간 보고서에서 “경영 판단의 선택과 집중을 위한 컨트롤타워의 재건, 조직 내 원활한 소통에 방해가 되는 장막의 제거, 최고 경영자의 등기 임원 복귀 등 책임경영 실천을 위한 혁신적인 지배 구조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같은 조언에도 대다수 외부 영입 인사가 5년을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는 등 삼성전자의 인재 부족은 갈수록 악화하는 실정이다. 이 회장이 직접 영입한 세바스찬 승(승현준) 전 삼성리서치 사장을 비롯해 컴퓨터 구조 분야 석학인 위구연 하버드대 석좌교수, 최연소 임원 타이틀을 달았던 인도 출신 천재 과학자 프라나브 비스트리, AI로보틱스 분야 권위자인 다니엘 리 등 모두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삼성전자를 등졌다.
소위 ‘올드맨’들의 귀환도 혁신과 지배구조 개선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유럽총괄 책임자로 성일경 전 부사장을 재선임했다. 성 부사장은 2022년 말부터 유럽총괄을 맡다 지난해 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3개월여 만에 다시 복귀하게 됐다. 한 전 부회장의 유고 이후 단행된 인사로 공석이 생기면서 즉시 퇴임 임원을 불러들인 것이다. 지난해 말에는 2023년 말 현직에서 물러났던 이원진 상담역이 DX부문 글로벌마케팅실장 사장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적극적인 인재 영입으로 대변되는 혁신의 의지가 빛을 발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관측되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