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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율 관세·수출 통제로 흔들리는 APEC 무역 질서 안보·무역 균형 위한 현실적 정책 조정 요구 품목별 정밀 통제와 예외 기준 마련 필요
본 기사는 The Economy 연구팀의 The Economy Research 기고를 번역한 기사입니다. 본 기고 시리즈는 글로벌 유수 연구 기관의 최근 연구 결과, 경제 분석, 정책 제안 등을 평범한 언어로 풀어내 일반 독자들에게 친근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기고자의 해석과 논평이 추가된 만큼, 본 기사에 제시된 견해는 원문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025년 4월, 미국이 중국산 회로기판에 60% 관세를 부과하면서 전자기기 조달 비용이 단기간에 급등했다. 미국소비자기술협회(Consumer Technology Association, CTA)는 이 조치로 노트북 등 IT 제품 가격이 최대 46% 오를 수 있다고 분석했고, 공공 조달 현장에서는 납품 지연과 발주 보류가 잇따랐다.
이 여파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전역에 퍼지고 있다. 역내 성장률은 2024년 3.6%에서 올해 2.6%로 하락할 전망이다. 공급망 혼선과 정책 불확실성이 시장 예측력을 떨어뜨리고 있으며, 기술 통제를 앞세운 경제 안보 조치가 오히려 통상 환경을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안보 조건부 자유무역’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략 기술의 악용 가능성에는 대응하되, 나머지 품목에 대해서는 예측 가능한 규범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변화하는 무역 환경, 달라진 우선순위
자유무역은 비용 효율성과 혁신 확산, 소비자 선택 확대를 통해 오랫동안 APEC의 성장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최근 지정학적 긴장과 기술 경쟁이 심화되면서 무역 정책의 초점은 비용 절감에서 기술 통제로 이동했다.
미국과 중국은 수출통제, 투자 심사, 공급망 재편 등 전략적 대응을 강화하고 있으며, APEC 회원국 다수가 이에 영향을 받고 있다. 하지만 2024년 기준 APEC이 전 세계 무역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개방이 아닌 규칙 기반의 상호 의존이 새로운 표준으로 요구되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APEC은 전략 기술과 무관한 저위험 품목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거래를 보장하고, 고위험 품목에 대해서만 정밀한 예외 규정을 적용하는 방식의 차등적 접근을 고민해야 한다.
관세가 다시 그리는 무역 지도
미국의 대중 수출통제는 APEC 역내 무역 흐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2024년 10월, 인공지능 칩 등 첨단 기술에 대한 수출 제한이 강화된 이후, 중국의 관련 반도체 수입은 전년 대비 약 80% 급감했다. 미국은 중국산 부품이 포함된 동남아 제품에도 고율 관세를 적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APEC의 전체 수출 증가율은 2025년 0.4%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2024년 5.7%에서 크게 하락한 수치다.

주: 연도(X축), 수출 증가율(Y축)
피해는 특히 중소국에 집중되고 있다. 필리핀은 미국으로 연 68억달러(약 8조8,400억원) 규모의 전자제품을 수출하지만, 상당수가 20% 관세를 적용받고 있다. 베트남은 안보 협력과 중국산 부품 의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있으나, 양국과의 교역이 GDP의 43%에 달해 뚜렷한 방향 설정이 쉽지 않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국과의 동맹을 고려하면서도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반도체 수출은 14% 줄었고, 메모리칩 수출은 32% 감소했다. 무역과 안보의 충돌이 실물 지표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전략적 교차로에 선 한국·베트남·필리핀
한국, 베트남, 필리핀은 모두 경제 안보와 자유무역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을 요구받고 있다. 한국은 전체 수출의 17%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이 대외 변수에 크게 흔들리고 있으며, 수출통제 장기화 시 국내총생산이 1.2%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베트남은 ‘탈중국’ 공급망 다변화의 핵심지로 부상했지만, 여전히 부품 의존도가 높다. 미국으로부터 1억8,000만달러(약 2,340억원)의 국방 지원을 받는 동시에 고율 관세의 리스크에도 직면하고 있다. 필리핀은 미군과의 방위 협력을 강화해 왔지만, 자국 IT 수출품이 고율 관세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지 못했다. 안보 협력만으로는 무역상의 불이익을 방지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유연하고 정밀한 대응이 필요
지금 필요한 것은 일괄적 통제가 아니라, 위험 수준에 따라 세분화된 조정이다. 전략성과 군사성이 낮은 소비재나 인도주의 목적 품목은 명확한 기준과 검증 절차를 통해 예외를 둘 수 있다. QR코드 기반 자재 명세, 무작위 검사 등으로 투명성을 확보하면 규제 우회 가능성도 줄일 수 있다.
공급망 측면에서도,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공동 수요 예측과 다년 계약, 생산 분산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비용 상승은 최소화하면서 납기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방식이다.
또한 수출 통제는 고정된 조치가 아니라, 위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돼야 한다. 위협이 사라진 품목에 규제가 지속되면 시장만 왜곡되고, 동맹국 간 신뢰에도 균열이 생긴다. 정밀성과 투명성이 결합된 통제가 필요하다.
위협은 분명하되, 해법은 정밀해야
무역 규제의 예외 조항이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는 현실적이다. 전략 기술이 저위험 소비재에 숨겨지거나, 규제를 우회하려는 시도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QR코드 기반 자재 확인, 무작위 분해 검사 같은 기술적 대응이 가능하며, 그 비용은 APEC 차원의 공동 재원으로 보완할 수 있다.
관세가 국내 생산을 유도할 것이라는 주장도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실제로는 생산 이전에 납품 지연과 조달 혼란이 먼저 발생하고 있으며, 미국 내 조립공정조차 해외 부품에 의존하고 있다. 관세가 자립보다 혼란을 키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동맹 결속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현실이다. 한국의 사례에서 보듯, 일률적 수출 통제는 전략 산업에 타격을 주고 정책 불확실성을 키웠다. 이러한 부작용을 줄이려면, 수출 규제를 정밀하게 조정하고 위협 수준에 따라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명확한 기준과 데이터 기반 검토를 바탕으로 유연하게 접근하면, 시장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고, 동맹 간 신뢰도 오히려 강화될 수 있다.
개방을 지키는 안보 전략이 필요
APEC의 자유무역 체계는 지역 성장의 핵심 기반이었다. 하지만 최근 안보 논리가 무역 원칙을 압도하면서 그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수출 증가율 급락, 조달 지연, 중소국의 가격 부담 가중 등 부작용은 현실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새로운 기준을 정비할 기회이기도 하다. 위험도에 따라 품목을 구분하고, 수출 통제를 전략 기술에 국한하며, 예외는 명확한 기준 아래 관리한다면, 안보와 개방은 양립할 수 있다. 문제는 전면 봉쇄냐, 정밀 조정이냐의 선택이다. 시장 전체를 조이기보다는 전략 분야에 한해 정교하게 대응하는 것이 지금 APEC에 필요한 접근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Free Trade's Second Frontier: Safeguarding Learning and Growth amid APEC's Security Turn | The Economy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2차 저작물의 저작권은 The Economy Research를 운영 중인 The Gordon Institute of Artificial Intelligence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