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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비 투자 재개로 HBM 진출 가속
DDR5 추격전 성과로 경험치 확보
품질·수율 등 글로벌 경쟁력 시험대

중국 최대 메모리 업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대규모 설비 투자와 인력 확충에 나서며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진입을 본격화했다. D램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대하며 쌓은 경험치를 활용해 차세대 HBM 양산 가능성을 높인다는 구상이다. 업계에선 이 같은 움직임이 글로벌 시장 내 경쟁력 확보로 이어지기 위해선 품질·수율 확보와 과잉 공급에 따른 가격 경쟁 리스크 관리가 선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경험치 토대로 기술 추격 속도 높여
14일 업계에 따르면 CXMT는 HBM 시장 진입을 위해 최근 신규 장비 발주를 재개했다. 생산 거점은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 공장으로, 중단됐던 투자 일정을 다시 가동해 HBM3 개발·양산을 위한 장비를 대거 도입해 라인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상반기에는 일부 모델의 생산 중단과 대미 제재 변수 등으로 장비 도입이 지연됐지만, HBM 수급난이 중국의 인공지능(AI) 전략을 제약하면서 일정이 앞당겨졌다는 해석이다.
장비 도입을 통한 양적 보강과 동시에 글로벌 전문 인력 채용 등 인력과 공정의 질적 보강도 병행된다. 시장의 후발 주자로서 기술 추격에 속도를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나아가 CXMT는 시장 측면의 선제 공급능력 확보에도 드라이브를 걸었다. 구체적으로는 HBM3 샘플을 화웨이 등 고객사에 조기 공급하며 인증·평가 트랙을 앞당겼고, 이르면 내년 양산에 돌입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대외 제재로 막힌 HBM의 공백을 국산화로 메우면서 자국 AI 가속기 생태계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내수 중심 초기 매출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러한 청사진을 단기간 내 현실화하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업계에선 CXMT이 D램 공정·설계 측면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선두권 기업 대비 2~3년의 기술 격차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 같은 기술 격차는 HBM3 이상에서 요구되는 패키징 완성도·발열·전력관리 난이도와 직결되는 탓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CXMT의 행보가 당장 글로벌 HBM 업황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란 평가가 주를 이룬다.

생산 능력 확대에 과잉공급 우려 촉발하기도
다만 CXMT의 기술 추격에 이미 가속이 붙었단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CXMT가 D램 시장에서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DDR5· LPDDR5 등 선단 메모리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는 진단이다. 실제로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지난 6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올해 CXMT의 D램 출하량 점유율이 1분기 6%에서 연말 8%까지 확대될 것이라고 관측하기도 했다. 선두 기업과의 기술 격차 축소가 수치로 확인된 것이다.
이같은 흐름은 CXMT의 생산·출하 체계가 빠르게 안정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아가 공정 미세화와 테스트·번인 최적화, 품질 로트 변동성 축소 같은 전통적 과제에서 일정 수준의 성과가 나와야 가능한 진전이라는 점에서 CXMT의 기본기가 생각보다 빠르게 자리 잡았다는 해석을 낳는다. 결국 이러한 경험치와 성장세는 HBM 개발과도 직결되는 자산으로 평가된다.
문제는 이러한 분전이 업계에는 공급 과잉 우려를 안긴다는 점이다. CXMT의 DDR5 생산 확대가 가시화하면 단기적으로는 가격 하방 압력이 커지고, 이는 다시 재고 조정 국면의 진입 속도를 부추길 수 있다. 다만 이 같은 공급 리스크는 역설적으로 HBM 전환의 가속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동일한 전공정 인프라를 바탕으로 패키징·테스트 등 후공정 역량을 보강해 고부가 제품 비중을 높이면, 단가 하락 압력을 상쇄하면서 수익성을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DDR5에서의 캐파 확대와 수율 안정은 CXMT에서 HBM으로 포트폴리오를 상향할 유인과 기반을 동시에 제공하는 셈이다.
글로벌 공략 3단계 로드맵
이 지점에서 시장은 CXMT의 HBM 패키징 역량 확장 가능성에 주목하는 모양새다. 가능성과 상용화 사이에는 뚜렷한 간극이 존재하는 탓이다. HBM은 실리콘 관통전극(TSV) 적층, 발열·전력관리, 범프·본딩, 언더필·몰딩, 고속 I/O 신뢰성 확보 등 다층 과제가 얽힌 제품군이다. 동일 공정이라도 적층 수가 늘어나면 결함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열 저항·전력무결성 관리에 실패하면 양산 계획 또한 무산될 공산이 크다. DDR5에서의 성과와 경험치가 필요조건인 건 맞지만, 충분조건이 되려면 후공정 완성도를 입증하는 단계가 남아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내수 시장을 보유했다는 점은 양호한 환경으로 평가된다. 레거시 모델에서 일정 수준의 수율만 확보하면, 안정적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실제 중국에서는 CXMT 외에도 통푸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복수의 기업이 이미 HBM2 양산 또는 시험생산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AI 반도체 자급자족 전략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초기에는 내수 수요 충족에 초점을 맞추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시장 공략을 위한 포석으로 읽힌다. 그러나 글로벌 무대에서의 경쟁력 확보는 전혀 다른 문제다. AI, 서버 등 고부가가치 시장에서는 가격 경쟁만으로는 브랜드 신뢰 확보가 어려운 만큼 중국 업체들이 ‘저가형 메모리 공급자’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선 품질과 신뢰성에서 확실한 성과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CXMT를 비롯한 중국 기업들의 HBM 전략은 ‘내수 수익 안정화 → 패키징 역량 고도화 → 글로벌 인증 및 진출’이라는 3단계 로드맵으로 요약된다. 초기 내수 판매로 수익 안정성을 확보하더라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실질적 입지는 HBM3/3E급 제품의 양산 수율과 장기 신뢰성 검증에 달려 있는 구조다. 이에 따라 향후 2~3년은 중국 메모리 기업들이 내수-글로벌 간 기술 격차를 줄이는 품질 검증의 시기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