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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중기 63곳 중 22곳 적자·폐업 등 '고전'. 10년 새 절반 이상이 영업익 평균 미달 中 저가 공세·기술 추격에 밀린 결과

2010년대 특정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린 국내 중소·벤처기업 10곳 중 2곳이 지난해 영업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업을 접거나 팔린 곳까지 포함하면 전체 기업의 3분의 1 이상이 생사기로에 놓여 있다. 기술 패러다임이 바뀌고 중국의 추격이 거세지면서 세계 1등 회사도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韓 중기 35%가 '생존 위기'
22일 통계청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정부가 분야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로 인증한 중소·벤처기업 63곳 중 전체의 17.5%인 11개 업체가 지난해 영업적자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9곳은 2023년 이후 2년 연속 적자에 빠졌고 7곳은 최근 5년 중 3년 이상 적자를 기록했다. 11개 기업은 폐업이나 매각 등으로 실적 확인이 불가능했다. 흑자 기업의 수익성도 좋지 않았다. 지난해 영업이익률이 국내 제조업 평균인 5.6%를 넘은 기업은 절반 이하인 29곳(46%)이었다. 이 가운데 영업이익률이 10% 이상인 기업은 18곳(28.5%)에 불과했다.
재무 상태가 악화한 기업은 팔리거나 사업을 접었다. 조선업 호황 속에 세계 1위 기업으로 이름을 날린 스타코(선박 내장재)와 극동일렉콤(선박용 형광등기구)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업황이 꺾이자 매각됐다. 선박 디젤엔진에 들어가는 부품을 정렬하는 데 쓰이는 ‘가이드 슈’로 세계 시장의 30%를 장악한 신아정기는 폐업했다.
LCD(액정표시장치) 관련 기업도 고전하고 있다. 디스플레이 패널의 불량을 감지해 레이저로 복구하는 레이저리페어 시장에서 세계 1위였던 참엔지니어링은 2010년대 중반부터 만성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LCD 밝기를 조절하는 부품인 프리즘시트 제조사인 엘엠에스, 평판디스플레이(FPD) 기판 절단면 연마 장비를 제조하는 미래컴퍼니 등은 수술용 로봇 같은 여러 신사업을 시작했지만 아직 반등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12년 LED(발광다이오드) 식각장비 시장의 60%를 장악했던 기가레인도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기술농사’ 결실 맺은 중국
국내 기업들이 고전하는 배경엔 중국이 자리하고 있다. 한때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중국은 최근 첨단산업을 이끄는 기술 선도 국가로 주목받고 있다.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성장한 기업들이 하나둘 성과를 내놓으며 세계시장 석권에 나서는 모양새다. 실제로 이제 로봇, 인공지능(AI), 배터리, 전기차, 조선 등 주요 기술 분야는 중국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챗GPT의 대항마 딥시크의 등장을 알렸던 중국의 AI 기술은 이미 미국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평이 많다.
첨단기술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로봇 분야에서도 중국의 성장은 두드러진다. 양승윤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중국의 로봇 산업이 무서운 이유는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기술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고 핵심 부품들의 중국 내재화가 상당 부분 진행돼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에서 중국 로봇 산업 경쟁력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2015년 3만3,000대였던 중국의 산업용 로봇 생산량은 지난해 약 48만4,000대로 10년간 15배나 증가한 상태다.
이 밖에 배터리, 조선 등 한국 기업들의 주요 먹거리 분야에서도 중국 기업들이 약진하고 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 1분기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국내 배터리 3사 합산 점유율은 전년 동기 대비 4.5%포인트 하락한 18.7%를 기록했다. 반면 중국의 CATL은 38.3%, BYD는 6.7%로 전년 동기보다 높아진 점유율로 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이제 ‘기술 분야에서 중국보다 우리(한국)가 앞선다’는 말은 더 이상 꺼내기 어려운 현실이 된 것이다.
다음 10년 ‘첨단 반도체 육성’ 준비
중국이 첨단기술 산업을 성장시키는 방식은 과거 한국 기업의 성장을 이끌었던 방식과 유사하다. 국가가 주도해 특정 산업군을 정하고 이어 아낌없는 정책금융 및 제도적 지원으로 집중 성장시키는 전략으로, 2015년 중국 정부가 발표한 ‘중국제조(메이드 인 차이나) 2025’가 대표적이다. 이는 30년 중장기 계획 중 1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10대 핵심 산업을 선정해 연구개발(R&D) 등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고 내수 시장에서 보호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다는 전략이다.
중국제조 2025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된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등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제조 2025가 집중 육성 대상으로 삼은 13개 핵심 기술 중에서 중국은 5개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랐으며 나머지 분야에서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국산 태양광 패널은 세계 시장의 85%, 하이브리드를 포함한 전기차는 70%, 배터리는 60% 이상을 차지하며 세계 1위 자리를 굳혔다. 의약품 원료(30%), 인공지능(20%) 등에서도 입지를 빠르게 확보하고 있다. 세계 고속철도 수주량은 2013년 1만9,000㎞에서 지난해 4만8,000㎞로 2.5배 늘며 세계 70% 이상을 차지한다.
다만 반도체와 신소재 등 일부 첨단 기술에는 선진국의 벽을 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 시절 시작된 반도체 대중국 규제도 기술 자립 속도를 늦췄다. 이에 중국 정부는 중국제조 2025의 후속 전략으로 첨단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중장기 산업전략을 준비하고 있다. 후속 계획에서는 향후 10년 동안 첨단 반도체 산업 육성을 우선한다는 계획이다. 미국 제조업 부흥을 약속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미래 산업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행보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