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정부, 인텔 지분 10% 확보, 삼성·SK 등 韓 기업에도 지분 요구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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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향후 반도체 기업 지분 확보 이어갈 것" 파운드리 축소 시 추가 주식매수청구권도 확보 美 정부, 이사회 참여 등 경영 개입은 하지 않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 반도체 기업 인텔의 지분 약 10%를 확보하며 최대주주에 올랐다. 당초 지급하기로 한 반도체 보조금을 지분 투자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이와 유사한 지분 확보 거래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힌 가운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보조금을 받는 국내 기업들에 대해서도 지분을 요구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WP "트럼프 행정부, 국민 세금으로 무리한 거래"
24일(이하 현지시각) 워싱턴포스트(WP)는 사설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인텔 지분 인수로 미국의 납세자들이 89억 달러(약 12조3,000억원)를 지불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WP는 "미국의 국가대표 기업 중 하나로 평가받던 인텔이 이제는 시장의 중심에 멀어진 노후 기업으로 전락했음에도 미 정부가 무리한 거래를 감행했다"며 "미국 국민이 그 대가로 얻게 될 것은 최근 몇 년간 전략적 기회를 잇달아 놓치고 실행에서도 번번이 실패한 기업의 주식뿐"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2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미 정부가 위대한 미국 기업 인텔의 10%를 완전히 소유하고 통제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같은 날 백악관 행사에서 "향후 인텔 지분 획득과 같은 일을 더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 19일 '미 정부가 반도체 보조금을 받는 마이크론, 삼성전자, TSMC 등에도 인텔과 같이 보조금 지급을 지분 투자 방식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로이터 통신의 보도와도 맞닿아 있다.
경영난 겪은 인텔, 美 정부 투자로 추가 자금 확보
이번 투자로 미 정부는 블랙록·뱅가드그룹 등 기존 주주를 제치고 인텔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분 투자금은 반도체법(CHIPS and Science Act)에 따른 보조금 57억 달러(약 7조9,000억원)와 안보 목적의 첨단 반도체 제조 지원금 32억 달러(약 4조4,000억원)로 구성됐다. 인텔에 따르면 미 정부는 이사회 참여, 정보 접근 등 경영 개입은 하지 않으며, 다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 지분율이 절반 이하로 내려갈 경우, 지분 5%를 추가로 매입할 수 있는 5년 만기 주식매수청구권을 확보했다. 반도체 기업의 지분이 외국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견제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그동안 인텔이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어려움을 겪어온 만큼 이번 거래를 통해 추가 자금을 확보했다는 점에 대해 미국 현지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신규 자금 투입은 인텔의 성장 전망을 즉각적으로 개선해 새로운 지식재산권과 기술 개발을 위한 협력 기회를 열어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가 의결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최대 주주로서 든든한 우군을 확보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알림으로써 인텔을 둘러싼 경영 리스크와 불확실성에 대한 시장 불안감을 완화하고 나아가 고객 확보에도 한층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각에서는 미 정부의 지분 참여가 실제로 인텔 회생에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인텔은 한때 부동의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이었지만, 인공지능(AI) 반도체 대응에 뒤처지면서 주력 제품인 컴퓨터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서는 AMD에 밀리고, 파운드리 사업에서도 부진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정부 자금 투입이 오히려 정상화를 위한 구조조정을 늦춰 인텔의 경쟁력 강화를 지연시킬 것"이라며 "현재 인텔에 필요한 것은 자금 지원이 아니라 경쟁사와 대등하게 겨루기 위한 기술 역량의 회복"이라고 지적했다.

美 정부 자국 기업 지원, 韓 기업에 불리하게 작용
한편 미 정부의 지분 참여 요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두 회사 역시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로부터 반도체 보조금을 배정받아 이미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가 이에 상응하는 지분을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지난해 12월 확정된 삼성전자의 반도체 보조금은 47억4,500만 달러(약 6조6,000억원)다. 만약 트럼프 행정부가 보조금 지급액만큼의 지분을 요구한다면, 삼성전자는 약 1.6%의 지분을 내줘야 하는데 이는 이재용 회장의 보유 지분(1.65%)에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역시 파운드리 정상화에 시동을 건 삼성전자에는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인텔은 현재 TSMC와 삼성전자가 주도하는 2㎚(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공정에 대응해 18A(1.8㎚), 14A(1.4㎚) 공정을 개발 중이다. 당초 연내 18A 공정을 적용한 CPU를 양산할 계획이었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낮은 수율 문제로 본격 양산 시점이 내년으로 미뤄졌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인텔이 자금 수혈을 계기로 공정 개발에 속도를 내고, 미국 정부가 엔비디아, 애플, 퀄컴 같은 대형 팹리스를 압박해 인텔에 물량을 몰아주는 것이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인텔과 같은 자국 기업을 넘어 외국 기업에도 지분 참여를 요구할지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있다. WSJ는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보조금을 대가로 보조금 수령 기업의 지분 확보를 검토 중이지만, TSMC, 마이크론 등 미국 투자를 늘리고 있는 대형 업체들에 대해서는 지분 확보를 추구할 계획이 없다"고 미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기업들의 반발도 지분 요구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TSMC는 미 정부가 보조금을 대가로 지분을 요구할 경우, 이미 받은 보조금도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