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전시 경제’로 침체 탈출 모색, ‘방산 중심 성장의 역설’ 우려도
입력
수정
‘균형재정’ 원칙 사실상 폐기
재정 폭주 따른 국채 리스크 부상
제조업 붕괴와 국방 의존의 역설

독일이 경기 침체를 타파하기 위해 1조 유로(약 1,600조원) 규모의 재정 지출을 선언하며 15년 넘게 고수해 온 긴축 원칙을 폐기했다. 국방·인프라·산업 전반에 자금을 투입하는, 이른바 ‘전시 경제’ 전략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국채 발행이 급증하면서 독일의 부채 비율 또한 급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독일 제조업 기반 약화가 갈수록 선명해지는 가운데, 이번 확장 재정을 둘러싼 지속 가능성에도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국방 중심 ‘전시경제’ 기조 강화
12일(이하 현지시각) 외신에 따르면 카테리나 라이헤(Katherina Reiche) 독일 경제에너지부 장관은 지난 8일 기자회견에서 “독일 경제는 2019년 이후 제자리걸음”이라며 “국민들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위기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독일 정부는 최근 경제 전망에서 올해 자국의 성장률로 0.2%를 제시했지만, 이는 지난 4월의 ‘제로’ 성장 전망에서 소폭 개선된 수치일 뿐, 본격적인 회복 신호로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 같은 전망이 현실화 하면, 독일은 동서독 통일 이후 2002~2003년에 이어 두 번째로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독일 정부는 이러한 정체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지난 16년간 유지해 온 균형재정 기조를 접고 ‘전시 경제’에 준하는 확장 재정으로 선회했다. 독일 연방의회는 지난 7월 부채브레이크(Schuldenbremse)를 우회하는 헌법 개정을 통해 앞으로 10년간 최대 1조 유로규모의 재정 투입 통로를 열었고, 국방·인프라·에너지망·핵심기술을 중심으로 특별기금과 예산을 병행 편성했다. 핵심은 방위 역량의 신속한 복원이다. 러시아의 전쟁 장기화와 미국의 대서양동맹 공약 약화 가능성 속에서 독일은 탄약·방공·기동장비 생산능력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군사물류에 필수적인 철도·도로·항만 체계를 동시 보강하겠다고 못 박았다.
재정 집행의 틀도 구체화됐다. 독일 정부는 향후 12년간 5,000억 유로(약 800조원) 규모의 인프라 특별기금을 조성해 노후 철도·교량·전력망을 개보수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중 상한을 사실상 해제해 ‘장비 격차’를 메우기 위한 대형 조달을 연속 발주한다. 이를 위해 장기물 국채와 공공투자펀드의 병행 조달, 주정부와의 매칭 투자, 조달·환경 인허가 절차의 패스트트랙을 도입해 착공 시차를 줄이는 방안 등이 포함됐다. 정부 문건에는 ”국방과 인프라를 먼저 확실히 움직여 민간투자의 마중물을 만든다”는 단계적 접근이 명시됐다.
이를 두고 시장과 연구 기관의 평가는 엇갈린다. 먼저 골드만삭스는 확장 재정의 신속한 집행을 전제로 2027년 독일 실질성장률이 2%에 근접할 수 있다고 전망했고, 일부 투자은행은 ‘독일판 마셜플랜’이 유로존 성장률을 0.4%p까지 끌어올릴 잠재력이 있다고 봤다. 반면 독일 대표 싱크탱크인 Ifo 경제연구소는 “확장적 재정은 ‘숫자상 회복’을 가려낼 뿐 민간의 생산성·투자 회복 없이는 폭넓은 반등이 어렵다”고 경고했다. 라이헤 장관 역시 “향후 수년 성장의 대부분은 방위 투자 등 대규모 정부지출의 효과”라고 인정하며 “노동공급 확충과 에너지비용 안정, 규제 간소화 같은 구조개혁이 병행되지 않으면 재정의 승수 효과가 약화될 수 있다”고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연방정부 국채 발행액 사상 최대치 채무국 전환 유력
독일의 확장 재정이 본격화하면서 채권시장의 초점은 ‘얼마나 더 찍느냐’에서 ‘시장이 이를 소화할 수 있느냐’로 옮겨가는 형국이다. 다국적 은행 ING에 의하면 독일 국채 발행 잔액은 이미 2조 유로(약 3,200조원)에 근접하며, 추가 재정이 전액 차입으로 충당될 경우 잔액이 단순 계산상 50%가량 늘어난다. 오랜 시간 ‘유럽의 안전자산’으로 분류된 독일 국채가 대량으로 쏟아질 경우, 자금시장은 글로벌 자금 재배치를 요구받게 된다. 독일의 확장 재정 선회가 안전자산의 발행국으로서 시장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느냐의 시험대가 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이 과정에서 금리와 환헤지 수익률 간의 미묘한 균형 또한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닛케이에 따르면 독일 10년물 금리는 이달 초 기준 2.57% 수준이지만, 달러 투자자가 환헤지를 적용하면 약 5%의 수익률로 계산돼 미국 국채를 웃돈다. 이는 해외 자금 유입의 유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로 독일 국채의 약 25%는 유로존 외 투자자가 보유 중이다. 다만 세수 부진과 경기 둔화로 인해 2029년까지 독일 연방정부 세입 전망이 330억 유로(약 54조원) 수준으로 하향 조정된 점은 부담 요인이다. 채권 발행 규모가 누적되면 장기물 금리의 변동성이 커지고, 입찰 호가 스프레드가 넓어져 장단기 금리곡선이 비대칭적으로 기울 공산이 크다.
재정 압박의 구체적 수치는 한층 선명하다. 독일 내각이 확정한 2026년도 예산은 총 5,205억 유로(약 865조원) 규모이며, 그중 국방비는 827억 유로(약 137조원)로 전년 대비 32% 증액됐다. 신규 부채는 2026년 1,743억 유로(약 290조원), 2029년에는 1,861억유로(약 309조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독일 정부의 부채비율 역시 현재 63%에서 2029년 70% 수준으로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워싱턴포스트(WP)는 “균형재정을 상징하던 독일이 유럽 최대 채무국으로 전환할 것”이라며 이번 예산안을 독일의 ‘정책적 전환점’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보면, 독일의 전시 경제형 재정 확대는 성장률 반등의 도구이자, 채권시장의 최대 리스크로 동시에 작용한다. 안전자산으로서 독일 국채의 매력이 유지되더라도 국방비 증액과 복지지출 확대, 세입 부진이 맞물리면 조달 비용의 상단은 제한적으로 낮아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독일 정부는 분기별 발행 계획의 사전 공표, 장·단기물의 균형 배분, 외국인 수요가 높은 10년물 중심의 유동성 확보, 녹색국채와 일반국채 간 교환 메커니즘 개선 등의 조치를 병행한다는 입장이지만, 응찰배수와 낙찰금리 차이(테일)가 불안정한 흐름을 보일 경우엔 이러한 설계 또한 모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외부 불안정성’이 역설적 버팀목으로
이처럼 비관적 전망 속에서도 독일이 전시 경제형 확장재정을 택한 배경에는 제조업 기반의 체력 저하가 자리하고 있다. 유럽 전반을 휩쓴 에너지·노동·규제의 삼중 부담이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은 비용 곡선 상단으로 밀려났고, 그 결과 글로벌 가치사슬 내 가격·납기 경쟁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특히 2022년 독일의 가스·전력 단가 급등은 철강·화학·시멘트 같은 에너지 집약 업종에 직격탄이 됐다. 지난해 독일 산업협회(BDI)가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는 45% 이상의 독일 기업이 향후 5년 내 생산 시설 일부를 해외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자동차는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분야로 꼽힌다. 언스트앤영(EY)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1년 동안 독일 제조업에서 사라진 일자리는 11만4,000개로 이 가운데 5만1,500개가 자동차 업계의 몫이었다. 글로벌 수요 둔화 속 과잉설비와 원가 상승이 겹치면서 기업들이 구조조정과 자본적지출(CAPEX) 축소로 대응한 데 따른 결과다. 자동차가 독일 제조업 고용·수출·연구개발(R&D)의 ‘허브’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파고는 독일 제조업 전반의 잠재성장률을 훼손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공산이 크다.
전문가들은 국방 수요에 대한 독일의 과도한 의존이 ‘단기 부양–장기 공백’의 역설을 낳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획·개발·인증·양산까지 수년이 걸리는 방산은 내수와 수출의 파이프라인이 긴 것은 물론, 국가 간 조달·정치 리스크의 변동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긴장이 없으면 주문이 평탄화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에 더해 방산 생산능력 증설은 소재·기계설비·전자광학·소프트웨어 등 광범위한 밸류체인을 요구하는 탓에 자동차·기계가 빠져나간 공백을 즉시 메우기 어렵다.
대안으로는 ‘전시경제형 총수요’와 ‘민간 생산성 회복’의 병행이 거론된다. 단기적으로는 전력망 확충과 산업전기 요금 안정(에너지 조세·네트워크 비용 합리화) 등을 통해 비용·규제 리스크를 낮추고, 중장기적으로는 자동차–방산 간 이중용도 기술 이전과 리쇼어링(생산기지 본국 이전) 인센티브를 통해 가치사슬을 재내재화하는 식이다. 현재의 확장재정은 필요조건에 불과하며, 독일 제조업의 재활은 에너지·노동·규제 개혁과 기술 전환의 실행력에 달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