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23일 박윤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이 '메타버스 경제 활성화 민관 TF' 3차 회의에 참석해 '메타버스 윤리 원칙'을 이달 28일에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박 차관은 “대한민국 디지털 전략 후속으로 세부 정책을 추진하면서 특히 메타버스와 블록체인같이 경계를 뛰어넘는 디지털 플랫폼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뜻을 강조해왔다”며 “메타버스 분야에서 구체적인 후속 조치의 일환으로 윤리 원칙과 규제개선 로드맵을 수립하는데 범정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윤리 원칙 제정 이유로 “가상세계에서도 상호 인격을 존중하고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저작권도 보호하는 등 사회 질서의 근간이 되는 규범과 법질서의 필요성에 따라 안전하고 신뢰성을 갖춘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목표”라며 “이 생태계는 한 부처와 기관에만 속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인 의견수렴을 거치고 있다”는 설명을 내놨다.
AI, OTT, 블록체인, 메타버스, 신산업 나올 때마다 '윤리 원칙' 만드는 정부
한 스타트업계 관계자는 박 차관의 이야기를 듣고 "또 시작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민간에서 어떻게 쓸 수 있을지 아직 확정도 나지 않은 수많은 사업 분야들이 있는데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업 분야를 개척할 의지도 없는 '공무원'들이 '앞길 가로막는 짓'을 하고 있다는 맹비난을 이어갔다.
기본적으로 메타버스 세계는 온라인으로 플랫폼이 옮겨온 2000년대 초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키보드로, 혹은 말로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수준을 넘어 '아바타'로 불리는 가상의 이미지를 내세워 소통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메타버스 세계 안에서 '아바타'를 고를 때 지나치게 자극적인 성인 콘텐츠가 선정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맞으나, 이렇게 '윤리 원칙'을 만들게 되면 그다음부터 모든 사업이 '윤리 원칙'에 맞는지 정부 관계자의 '개입'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공무원'이라는 조직은 그렇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디지털 광고 배달 이륜차 서비스를 시작하려다 정부의 왜곡된 규제샌드박스 적용 탓에 3년간 벽에 부딪히다 겨우 추가 승인을 얻었던 '디디박스'의 경우 이런 사소한 규정 해석 문제로 공무원 집단과 문제를 겪다 아예 해외 진출을 결정한 바 있다.
한국 정부, 사업가를 키우는 기관이 아니라 죽이는 기관
지난 8월 26일 메타버스 윤리 원칙 토론회가 개최되고 난 다음 정부에서는 '외신에서도 보도가 있었다'며 시장 반응이 긍정적이라고 해석했으나,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한국 정부가 메타버스 시장에 관심이 많다'는 긍정 반응과 더불어 '한국은 모든 것에 정부가 개입하는 나라'라는 부정적인 댓글도 함께 올라왔다.
정부의 윤리 원칙 연구는 이미 AI 관련 윤리 원칙에서부터 시장의 조롱을 받았다. 지난 2020년 12월, 인공지능, 윤리학, 법학 등 산학연과 시민단체 주요 전문가 논의와 자문을 거쳐 '사람 중심의 인공지능'을 핵심 키워드로, 최고가치 인간성(Humanity)을 위한 3대 기본원칙과 10대 핵심 요건을 제시한 '인공지능 윤리 기준'을 발표했다. 이와 더불어 'AI, 인간에게 피해 끼치면 안 된다', '인간 지식 넘보는 AI, "사람 중심" 윤리 기준이 필수' 등등의 소제목을 단 보도자료를 통해, '인간성'을 최고가치로 삼는 윤리 기준을 제시했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놨다.
안타깝게도 현실의 AI는 입력한 데이터와 같은 패턴을 가지는 상황에 맞게 연결시켜주는 것 이상의 기술이 아니다. '인간의 지식을 넘보는' 4차원의 기술이 아니라 단순히 코드 몇 줄을 통해 기존에 입력한 데이터와 유사한 패턴이 나타날 경우에 같은 답안지의 결괏값이 나오도록 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윤리 기준'이 선정되고 나자 AI 기술 개발 관련된 모든 정부 발주 프로젝트에는 '인공지능 윤리 기준'을 충족했는지 여부가 점수표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정부 프로젝트를 하겠다는 회사들은 그런 비생산적인 윤리 기준 충족 여부를 인정받기 위해 마케팅 비용을 지불하며 외부 기관들의 '인증'을 받는 절차를 거치게 됐다.
즉 기업들에 쓸데없는 비용만 쓰도록 만든 것이다. 정작 돈을 버는 기관은 그런 세태를 이용해 '인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과장하는, 그렇지만 실체는 대단치 않은 '전문가' 집단이다. 공무원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보고서 몇 줄을 더 쓰기 위해 했던 작업이 실제 기술 상황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가짜 전문가를 양산하게 된 것이다.
메타버스에는 3대 지향가치, 8대 실천원칙, 템플릿은 2020년 인공지능 윤리 기준과 동일
이번 TF 3차 회의에서 나온 메타버스 윤리 원칙 발표 자료는 지난 2020년 인공지능 윤리 기준 발표 때 봤던 그것과 거의 동일했다. 심지어 10개 특성 결합으로 설명했던 10대 핵심 요건과 동일한 내용이 반복된 8대 실천 원칙을 제시했다.
실제 알맹이가 없는 것도 2020년과 다를 바 없었다. 이제 이달 28일에 윤리 원칙이 확정 발표가 나면 앞으로 정부 발주 프로젝트들 중 '메타버스'가 들어가는 모든 프로젝트들에 '메타버스 윤리 원칙'을 지키고 있는 기업인지 확인하는 절차와 그에 따른 가산점 분배에 대한 평가 방식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의 프로젝트에서 결정이 나고 나면 다른 프로젝트들이 같은 기준을 그대로 복사해서 갖고 가게 된다.
이제 곧 '메타버스 윤리 인증'이라는 서비스가 소리소문없이 돌아다니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전문가로 포장한 '외부 기관'의 인증을 받았다고 하면 공무원들은 굳이 자신들이 복잡한 평가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간단하게 해당 영역에 만점을 주게 된다. 가짜 전문가들에 마케팅 비용을 쓰도록 만드는 시스템이 완성되기 직전인 것이다.
정부 프로젝트 수주를 몇 차례 시도하다 완전히 포기했다는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굳이 그런 잉여스러운 인증을 받도록 만드는 시스템이 무쓸모"라며 "윤리 기준, 윤리 원칙은 그냥 말만 만들어놓고 정부 프로젝트들은 실제 기술 역량을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정부 공무원들이 수십억원의 세금과 2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만든 '윤리 원칙'을 그렇게 버려진 종잇조각으로 만들 리 있을까? 잘 쓰고 있다고 홍보해야 본인들의 치적이 되지 않을까? 공공조직은 그렇게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