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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개혁, 고통 분담을 통한 사회적 합의 없이 개혁 어렵다는 의견 기금 소진은 기정사실, 받아들이고 국민 설득할 방법 찾아야 일본도 고통 분담 인식시켜 사회적 합의 도출하는 데 성공
30일 윤석열 대통령이 "연금 개혁은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나 사회적 합의 없이 결론적 숫자만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연금 개혁의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야당이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 방안을 '숫자 없는 맹탕'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관련해 단순히 숫자를 넘어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답변이다. 윤 대통령은 "정부의 이번 국민연금 종합 운용계획안을 두고 '숫자가 없는 맹탕'이라거나 '선거를 앞둔 몸 사리기'라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며 "최고 전문가들과 80여 차례 회의를 통해 과학적 근거를 축적했고, 24번의 계층별 심층 인터뷰를 통해 의견을 경청하고, 여론조사를 실시해 일반 국민 의견도 철저히 조사했다. 이를 기반으로 방대한 데이터 자료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국민연금 개혁, 합리적 계산 모델, 과학적 근거보다 결국 사회적 합의 도출이 최우선
국민연금 개혁과 관련해 여의도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번 발언이 야당의 공세에 대한 대통령의 정치적인 답변이지만 동시에 그 어떤 과학적 근거보다 국민의 마음을 얻는 사회적 합의가 가장 우선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주장을 내놨다. 올해 초부터 이어진 국민연금 개혁 논의 대부분이 연금 소진 예상 연도가 언제인지, 수익률 계산이 합리적인지, 1인당 얼마를 더 납부해야 하는지와 같은 '숫자'에 매몰돼 있던 반면, 정작 국민연금 개혁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대한 부분이 간과되었던 점을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30일 통계청 사회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고 답한 19∼29세의 60.3%가 주된 준비 방법으로 '국민연금'을 꼽았다. 이어 30대 62.9%, 40대, 61.8%, 50대 63.7%가 국민연금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대부분의 국민이 직접 저축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연금을 믿고 노후를 대비하고 있는데, 정작 국민연금은 국민들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10년 전인 2011년 기준 조사에서 국민연금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응답자는 19∼29세 58.6%, 30대 56.0%, 40대 59.6%, 50대 60.4%였다. 지난 10년 사이에 국민연금에 대한 정신적인 의존도가 전 연령에 걸쳐 약 10%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국민연금 개혁의 목소리가 강한 가장 큰 이유는 연금 수급액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가입 기간과 이에 따른 소득대체율 등을 고려하면 수급액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 평균임금 가입자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31.2%로, OECD 평균 공적연금 소득대체율(42.2%)보다 10% 이상 낮다. 기초연금을 포함해 계산하더라도 한국의 공적연금 소득대체율은 35.1%로 OECD 평균에 못 미친다. 이마저도 가장 소득대체율이 높을 것으로 가정된 만 22세 가입, 정년인 60세 은퇴를 가정한 것으로 대학 재학, 군 복무 등을 마치고 취직하게 되는 평범한 한국인 남성을 대상으로 할 경우 소득대체율은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거짓으로 포장하기 때문에 문제, 솔직히 받아들이고 사회적 합의 도출해야
지난 27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의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 발표 직후, 한 정치권 관계자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결국 국민연금이 바닥나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며 "각종 자료로 사실을 숨기려 하지 말고, 부족해지는 만큼 조금씩 나눠서 감당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번 재정계산위원회의 발표를 기준으로 할 경우, 1985년생의 연금 수령 연도는 2050년으로 평균 가입 기간 24.3년, 소득대체율은 26.2%에 불과하다. 10년 후인 1995년 출생자를 기준으로 할 경우 2060년에 수령을 시작하며 평균 가입 기간 26.2년, 소득대체율은 27.6%다. 이제 막 국민연금에 가입하는 청년들에게도 OECD 평균 연금 소득대체율보다 15% 이상 낮은 연금이 지급될 예정인 것이다.
사회적 합의에 대한 필요성이 언급되자, 다른 정치권 관계자는 "연금이 생활비의 25% 남짓에 불과하다는 것이 알려지면 연금 내려는 비율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며 "국민연금을 대폭 상향시키는 사회주의 국가들 방식으로 갈 것이 아니라면 사회적 합의는 곧 국민연금이 쓸모없는 연금이라는 것을 국민 대다수에게 인식시키는 작업"이라고 답했다. 특히 이른바 '많이 내고 적게 받는다'는 표현이 직접 적용될 가능성이 높은 청년 세대에게는 국민연금 이탈 유인이 강하게 확산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기도 했다.
국민연금은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폐지 여론이 제기돼 왔다. 자유기업원에 따르면 지난 2004년 MBC의 여론조사에서 이미 폐지 여론이 92%에 달했고, 이후 국민연금 찬반 조사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폐지 여론이 유지 여론보다 압도적으로 더 높았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도전이 자칫 폐지로 결론 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개혁은 고통 분담에서 시작, '모두가 다 더 내고 덜 받아야' 불만 잠식시킬 수 있어
지난 2004년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의 연금 개혁은 보험료를 더 내고 연금을 덜 받는 개혁이었고, 고통 분담을 일반 국민에게 인식시키기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당시 일본 정치계 일각에서는 자민당 일부 세력이 고이즈미 총리를 일회성 단기 총리로 밀어 연금 개혁과 관련된 모든 비난을 짊어지게 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의도로 고이즈미 총리를 지지했다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연금 거짓말'을 끊고 솔직하게 모든 사람이 고통을 분담하지 않으면 연금을 당장 폐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론과의 대담 중 솔직히 인정하고 '10년 안심 플랜'이 유지되려면 '더 내고 덜 받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모두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당시 13.58%였던 보험료율을 18.3%까지 단계적으로 높이는 연금개혁법은 여론을 뭇매를 맞았으나, 우정 개혁 등 다른 개혁 과제들과 맞물려 국민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미래세대도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설득이 국민들의 여론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국내의 국민연금 개혁 논의도 같은 수순을 밟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현재 알려진 논란대로라면 노인 세대는 큰 피해 없이 국민연금의 수혜를 다 받는 반면, 청년층은 더 많이 부담하고 나중에 덜 받게 되는, 이른바 '독박 피해'를 입는 세대가 된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등 각종 연기금들이 모두 다 피해를 감수하고, 노령층이 청년층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다'는 표현을 피할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합의가 나오도록 피해의 크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