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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짐 나눠 들어야 동맹” 신호 금속 동맹으로 연대 선택한 유럽 韓 정부 차원 주도적 대응 전략 부재

미국이 공급망 기여도를 기준으로 동맹국 간 실익을 저울질하는 가운데, 한국이 전략 자산을 충분히 갖추고도 효과적인 통상 프레임을 마련하지 못한 채 대응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다. 그러는 사이 유럽은 미국과 금속 공급망 중심의 전략적 연대를 구축했고, 무역 협상까지 성공적으로 이끌며 외교적 능력을 입증했다. 이에 업계에서는 한국이 기업 단위의 개별 움직임에 머물며 실질적 협상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동맹국에 명확한 ‘역할 분담’ 요구
30일 외교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은 잇따른 무역 협상에서 상대국들에 공급망과 경제 리스크를 공동 부담하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안보와 경제 측면에서 무임승차의 시대는 끝났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며, 이에 각국이 저마다의 전략산업을 활용해 세계 경제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한국은 미국과의 안보 동맹을 무기로 일정 수준의 협상력을 유지해 왔지만, 더 이상 그 전략이 유효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미국이 관세 협상에 안보 의제를 포함시킨 것도 이와 같은 의도로 읽힌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월 초 부과 예정이었던 고율 관세를 90일간 유예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전 세계에 미군을 배치하면서 많은 비용을 내지만, 충분한 보전은 받지 못한다”며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관세 협상을 방위비 분담금 등 다른 현안들과 묶어 ‘원스톱’ 방식으로 일괄 처리하겠다는 의미다.
나아가 미국은 관세 유예 기간 동안 전략 품목에 대한 공급망 점검을 재개하겠단 계획을 밝히면서 그 중심 파트너로 한국을 지목했다. 단순한 제조 역량을 넘어 지정학적 신뢰성을 갖춘 파트너로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재조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명확한 역할 분담 요구이기도 하다. 무조건적인 호혜나 관세 유예만 기대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 셈이다.
유력한 방안으로는 전략금속 부문의 공급망 강화가 거론된다. 미국이 구상하는 탈(脫)중국 공급망에 세계 1위 비철금속 기업 고려아연을 비롯한 우리 기업들이 참여하는 방안이다. 정부 관계자는 “한·미 양국은 고려아연 비철금속 제련소 설립과 관련해 실무 협의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 같은 내용이 최종 협상안에 포함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아연과 같은 비철금속은 중국의 점유율이 높고 대체가 어려운 품목으로, 미국 입장에서는 공급선 다변화가 시급한 상황이다.
다만 이러한 시도가 정부 차원의 포괄 전략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전략 자산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이를 외교·통상 협상 카드로 전환할 수 있는 정책적 체계가 미비한 탓이다. 고려아연 사례처럼 일부 기업이 각자의 판단 아래 미국 투자 여부를 검토하고는 있지만, 국가 차원의 로드맵이나 자원 외교 전략이 동반되지 않으면서 실효성 있는 협상 프레임으로는 연결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업의 역량을 뒷받침할 정책 설계와 외교적 조율이 병행되지 않으면, 공급망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는 어렵다는 게 외교통상 전문가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미·EU “무역·금융·자원 포괄하는 경제 안보 협력”
한국 정부가 뚜렷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해 분주한 사이 유럽연합(EU)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철강, 알루미늄, 고철 등 금속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공급망 협력 구도를 먼저 구축했다. 양국이 금속 품목에 대한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고, 전략적 연계를 본격화한다는 구상이다. 이 같은 협정은 미국이 자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추진해 온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이후 EU가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사례 중 하나로, 기존의 갈등보다는 연대를 선택한 결과물로 해석된다.
마로스 셰프초비치 EU 무역 담당 집행위원은 28일(현지시각) 열린 기자회견에서 “비시장적 공급 과잉이 철강 산업을 파괴하고 있다”며 이번 금속 동맹의 배경을 밝혔다. 그는 직접 중국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공급 과잉’이라는 표현을 거듭 강조하며 중국을 향한 불편한 시각을 드러냈다. 셰프초비치 위원은 “(미국과의 협력은) 철강, 알루미늄, 구리 및 그 파생상품에 대한 공동 행동의 명확한 전망을 제시한다”면서 “우리는 과잉 생산의 원천이 되는 경제 주체를 다루는 데 공동의 접근법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속 동맹을 포함한 미-EU 간 무역 협정은 ‘달러 패권의 복원’이라는 미국의 전략적 목표와도 연결된다. 미국은 공급망을 재정비하는 동시에 글로벌 통화 질서를 정비하려는 이중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동맹국 내부의 정책 조율과 제도적 연계를 전제로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이번 협정은 미국과 유럽의 관계가 무역·금융·자원 정책을 포괄하는 경제 안보 중심의 협력 구도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곧 공급망을 기반으로 한 전략적 동맹의 새로운 전형으로 평가된다.
전략 품목 생산역량 활용 가능성
이처럼 미국은 공급망 동맹을 기반으로 한 통상 전략을 하나둘 현실로 이뤄가고 있다. 이에 향후 전개될 관세 협상에서는 전략 품목별 기여 수준에 따라 차등적 혜택을 부여하는 방안도 유력하게 논의될 전망이다. 일방적인 양보와 관세 인하보다는 공급망 안정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국가에 실익을 분배하는 방식이다. 이는 외교를 일종의 거래로 보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협상 스타일과도 궤를 같이한다.
한국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과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대응은 개별 기업의 기술 수출이나 미국 현지 생산시설 확대 등에 머물러 있어 정부 차원의 통상 전략이나 공급망 프레임 설계로는 이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미 반도체와 이차전지 등 전략 품목에서 상당한 생산역량을 갖춘 만큼 기여 가능한 분야를 선제적으로 제안하고, 이를 토대로 미국과의 조건부 협상을 주도했어야 한다는 평가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무역협상 구도는 표면적인 관세 인하를 넘어 공급망 기여 여부를 핵심 조건으로 설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형국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이 뒤늦은 대응에 나설 경우, 협상 주도권 확보는 물론 실익 면에서도 불리한 입장을 피하기 어렵다. 한국이 자랑하는 기술력만으로는 실효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공급망 기여 방식과 규모, 시점까지 아우르는 구체적 로드맵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