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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 협상 마무리 ‘난기류’ 美 상무 “이제는 트럼프에 모든 것 가져와야” 현 韓 제안에 불만 시사, 막판 압박 최고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에서 관세 협상을 주도하는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한국에 ‘최선의 협상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달 1일 상호관세 부과 시한을 앞두고 한국이 막바지 고위급 협상에 총력을 기울이는 상황에서 한국에 추가 양보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를 사흘도 채 남겨두지 않은 가운데, 외교가에서는 한미 간 무역협상이 중대 고비를 맞았다는 우려가 나온다.
美 “최선의 무역협상안 올려라”
29일(이하 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러트닉 장관은 최근 한국 정부 당국자에게 “관세 협상과 관련해 최선의, 최종적인 무역협상안(best and final trade deal)을 테이블에 올려달라”고 촉구했다. 러트닉 장관은 최근 스코틀랜드에서 가진 한국 정부 관계자들과의 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최종적인 제안을 제시해야 할 때 “모든 것을 가져와야 한다”면서 이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한국 측에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연합(EU), 일본, 영국 등 주요 파트너와 이미 다수의 무역 협정을 체결한 상황에서 왜 한국과 새로운 협정이 필요한 것인지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WSJ은 전했다.
앞서 러트닉 장관은 전날 미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스코틀랜드에서 만났다고 확인하면서도 추가적인 세부 내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김 장관과 여 본부장은 지난 24∼25일 러트닉 장관을 만나 2차례 협상을 했다.
24일에는 워싱턴DC에서 만났고, 25일에는 그의 뉴욕 자택까지 찾아가 협상을 이어갔다. 이어 러트닉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을 수행해 영국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자, 김 장관과 여 본부장도 스코틀랜드를 찾아가 러트닉 장관 등을 만났다. 오는 31일에는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해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과 통상 협의를 갖고, 조현 외무부 장관도 방미해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면담하는 등 전방위 협상 일정이 예정돼 있다.

미국-日·EU 합의한 상호관세, 기준점되나
관련 업계는 이번 주 미국에서 협상 타결 소식이 들려올지 주목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미국에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로 이름 붙인 수십조원 규모의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등 산업 협력과 '1,000억 달러+α(알파)' 대미 투자 등을 패키지로 제시하며 관세 협상에 임하고 있다. 정부는 다음 달 1일부터 부과 예정인 25%의 상호관세를 면제받아 0%로 만들고 현재 자동차(25%), 철강·알루미늄(50%)에 붙고 있는 품목관세를 면제받는 것을 '베스트 시나리오'로 상정하며 협상 중이다.
하지만 한국의 희망 사항은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특히 대미 수출 비중이 높은 철강·알루미늄의 경우 일본과 EU가 모두 50%의 품목관세를 깎지 못한 만큼 한국 역시 이를 낮추는 것이 쉽지 않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다만 EU가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해 일정 수준까지 50% 관세를 면해주는 쿼터제 도입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국 역시 '철강 쿼터' 적용을 기대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있다. 앞서 한국은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인 2018년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전 세계 철강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할 때 협상을 통해 수출 물량을 70% 수준으로 줄이는 대신 대미 철강 수출에서 '263만 톤에 대한 무관세 쿼터'를 인정받은 선례가 있다.
EU가 아직 현실화하지 않은 반도체·의약품 등에 대한 관세를 15% 선에서 막은 것도 한국의 협상 결과를 평가하는 기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무역확장법 232조 조사에 근거해 향후 의약품과 반도체에 품목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한 상태인데,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미국과 협상 직후 15% 관세율이 반도체, 의약품 등 대부분 분야에 적용되는 상한선이라고 밝힌 바 있다.
韓 자동차, '관세 15%' 받아내도 불리한 게임
자동차 관세 또한 최상의 시나리오는 일본·EU 수준인 '상호관세 15%·자동차 관세 15%'로 보는 것이 합리적라는 평가가 많다. 15% 역시 부담되는 숫자지만, 대미 수출 구조가 비슷한 일본·EU와 같은 수준의 관세가 부과된다면 미국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해볼 만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국내 자동차업계에서는 관세 15% 받아내도 불리한 게임이라는 위기 의식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고율관세를 부과하기 전까지 한국산 자동차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덕분에 관세가 0%였다. 반면 미국과 FTA를 맺지 않은 일본산과 유럽산은 2.5%의 관세를 물었다. 근소한 차이지만 미국에서 한국 차가 내세우는 ‘가성비’의 바탕이 됐다. 한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똑같은 15% 관세가 적용돼도 FTA 효과가 사라져 예전보다 불리해지는 셈인데 만약 15%보다 높으면 타격이 크다”고 지적했다.
실제 현재 현대차 세단 아반떼는 미국 내 판매 시작 가격이 2만2,125달러(약 3,058만원)로, 경쟁 차종인 일본 토요타의 코롤라(2만2,325달러)와 독일 폴크스바겐의 제타(2만2995달러) 대비 저렴하다. 3사가 현재의 관세만큼을 반영해 가격을 올릴 경우 아반떼는 2만7,656달러(약 3,822만원)가 된다. 코롤라(2만5,674달러)와 제타(2만6,444달러)보다 더 비싸지는 것이다. 최근 2분기 실적을 공개한 현대차그룹의 경우 이미 관세 쇼크가 현실화하고 있다. 2분기에만 관세 충격 여파가 1조6,142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 결과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19.6% 급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