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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이후 물가 누적 상승률 12.8%, 10년 전 3배 육박
빚 많이 낸 30대 전세 세입자 및 60대 이상 타격 가장 커
7분기째 가처분소득 웃도는 물가, 실질 소득 위축 불렀다
고물가·고금리 여파로 소비 증가율이 크게 위축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특히 빚을 내 전세를 구한 청년층의 경우 물가 상승에 따른 전세보증금의 실질 가치 하락과 이자 부담 등 부정적 영향이 가장 컸던 것으로 파악됐다. 식료품 등 물가가 급상승한 필수재를 주로 소비한 고령층과 저소득층도 소비여력이 크게 줄었다. 이렇듯 인플레이션에 의한 고통은 소득과 나이, 자산에 따라 체감온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물건을 구매하더라도 현금 수익에만 의존하는 서민층에겐 화폐 가치 하락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가 12.8% 급등, 고령·청년·저소득층 직격탄
한국은행이 27일 공개한 '고물가와 소비:가계 소비 바스켓·금융자산에 따른 이질적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1년부터 올해 4월까지 소비자물가 누적 상승률은 총 12.8%(연율 3.8%)로, 2010년대 평균(연율 1.4%)의 3배에 육박했다. 글로벌 공급망 차질과 이상기후로 원자재와 식료품 가격이 급등하자 실질 구매력이 줄어든 가계의 소비도 감소한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이후 3년 동안 식음료품과 에너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각각 23.5%, 24.1%에 달한다.
물가 급등은 국내 소비 위축으로 이어졌다. 한은 연구진이 2021년부터 가파르게 오른 물가가 소비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본 결과 2021부터 2022년까지 2년간의 실질 구매력 축소는 소비 증가율을 약 4%포인트 낮춘 것으로 파악됐다. 가계별 금융자산·부채의 실질가치 변동에 따른 효과도 같은 기간 소비를 1%p 추가로 위축시켰다. 이 기간 누적 기준 소비 증가율(9.4%)을 고려할 때 물가 급등이 없었다면 소비가 14% 이상(9.4%+5%p) 늘 수도 있었다는 의미다.
민간 소비는 올해 들어 다소 회복되긴 했지만 여전히 2015∼2019년 추세를 크게 밑돌고 있다. 재화와 서비스를 나눠보면 재화 쪽의 물가 상승·소비 부진 현상이 더 뚜렷한 모습이다. 재화는 서비스보다 글로벌 공급 차질과 이상 기후 등 공급 요인의 영향을 더 크게 받기 때문이다.
물가 급등은 자산 가치 하락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은 30대 전세거주자로 나타났다. 물가 상승에 전세보증금 자산의 실질가치가 낮아진 데다, 변동금리가 많은 탓에 고금리로 이자 비용이 증가하는 등 고물가·고금리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은 탓이다. 금융자산 비중이 높은 고령층도 물가 상승으로 인해 자산 가치가 함께 떨어지면서 이중고에 시달린 것으로 파악됐다. 고령층의 경우 대체로 부채보다 금융 자산을 많이 보유한 만큼 물가 상승에 따른 자산 가치 하락 경로로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물가 상승을 체감하는 정도는 고령층과 저소득층에서 특히 높게 나타났다. 2020∼2023년 고령층과 저소득층이 체감하는 실효 물가 상승률은 각각 16%, 15.5%로, 청·장년층(14.3%)과 고소득층(14.2%)보다 약 2%가량 높은 수치다. 이는 물가 상승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식료품, 에너지 등 필수재의 소비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고령층이 소득 1, 2분위에서 각각 62%, 39%를 차지하는 만큼 유사한 이유로 저소득층의 실효 물가 상승률도 높았다.
반면 금융 부채가 많은 중장년층은 고물가 상황에서 부채 감소 효과를 누린 것으로 분석됐다. 물가가 오를수록 빚의 실질가치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장년층은 주택담보대출 비중이 가장 높은 연령대다. 물가 상승에 따른 화폐가치 하락은 인플레이션일수록 돈을 가진 사람보다 돈을 빌린 사람에게 유리한 셈이다.
민간 소비 끌어내리는 인플레이션
물가가 오르면 민간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가계의 실질 구매력과 함께 자산의 가치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소득과 물가는 가계가 경제 상황을 체감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지표로, 소득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물가 상승이 더 빠를 경우 실제 소득은 줄어든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올해 1분기 전체 가구의 가처분소득(이자와 세금을 내고 소비나 저축에 쓸 수 있는 돈)은 월평균 404만6,00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4% 늘었으나, 외식과 가공식품 물가 상승률은 각각 3.8%, 2.2%로 나타났다. 외식 물가가 소득보다 무려 3배가량 비싼 셈이다. 이런 현상은 2022년 3분기부터 올해 1분기까지 7분기째 이어지고 있다.
이렇다 보니 실질소득은 쪼그라드는 모습이다. 통계청의 ‘1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물가를 반영한 가계 실질소득은 1년 전 대비 1.6% 줄면서 1분기 기준으로 3년 만에 감소 전환했다. 이번 감소폭은 2017년 1분기(-2.5%) 이후 가장 크다.
이는 결과적으로 소비 심리 위축을 불러왔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5월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소비심리지수(CCSI)는 98.4로 전월 대비 2.3포인트 낮아졌다. 지난해 12월(99.7) 이후 5개월 만에 100 미만을 기록한 것이다. 소비심리가 100보다 높으면 장기 평균보다 경기가 좋아질 것이란 시각이, 100보다 낮으면 부정적인 시각이 우세하다고 해석된다.
고물가에 미국 소비 패턴도 변화
미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가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 행동 변화를 실증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이 비교적 견조한 경기 회복세와 낮은 실업률을 보이고 있음에도 지난해 포장 소비재 구매량을 전년 대비 평균 2~4%, 비타민 등 건강보조제는 5% 줄인 것으로 파악됐다.
미국 소비자의 구매량 감소는 신선식품, 개인 생활용품, 가정용품 등 다양한 상품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동 기간 대다수 상품 범주와 유통 경로에 걸쳐 소비자의 구매 빈도는 증가했으나, 구매량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점이다. 특히 Z세대 소비자는 신선식품과 건강미용 상품을 전년보다 10% 더 빈번하게 구매했는데 구매 시마다 구매량은 더 줄었다. 아울러 총 5개 상품 범주와 총 5개 유통채널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최근 미국 소비자는 식품점 등 오프라인 유통 매장에서 온라인 채널로 이동하고 있음이 입증됐다. 여기에는 물가 상승과 구매 여력 감소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분석된다.
소비자심리지수도 큰 폭으로 하락했다.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미시간대학이 발표한 5월 소비자 심리지수 예비치는 67.4로 4월의 77.2보다 큰 폭으로 하락했다. 이는 다우존스의 컨센서스 전망치인 76에도 한참 못 미칠 뿐만 아니라 6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여전히 높은 인플레이션과 고금리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미국 경제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소비자 지출은 인플레이션이 치솟은 지난 몇 년간 성장을 촉진, 미국이 경기 침체에 빠지지 않게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고물가가 지속되고 여분의 예금이나 경기 부양용 지원금 등도 점차 사라지면서 최근 가계들도 결국 소비 줄이기에 나선 모습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고소득층도 지출에 더 신중하게 됐다는 점이다. 영국의 유명 패션 브랜드 버버리는 지난 3월 말 끝난 회계연도에 미주 지역 매출이 전년 대비 12%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프랑스 명품 그룹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도 지난달 실적 발표에서 미국 내 고급 주류 부문의 수요가 급감했다고 밝혔다.
인플레이션은 2022년 중반 무려 9%라는 40년 만의 최고치에서 지난달 3.4%로 대폭 감소했다. 그러나 이는 물가 상승 속도가 더딘 것을 의미할 뿐,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며 지난 몇 년 동안 누적된 가격 충격은 여전히 소비자 심리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인상하고 양적 완화를 축소하면서 어느 정도 상승 압력을 억제하고 있긴 하지만 한 번 올라간 물가가 하락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점에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