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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정부 "네옴시티 재검토, 일부 연기 및 축소"
국제 유가 정체로 사우디 재정적자 문제 심각
애초에 과장된 계획, 외국 투자자 찾기 어려워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추진하고 있는 ‘네옴(NEOM)시티’ 사업 계획이 축소될 것이라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사우디의 주 수입원인 국제 유가가 좀처럼 오르지 않아 재정난이 심각한 데 따른 결정으로 풀이된다.
170㎞ 계획 ‘더 라인’, 2.4㎞로 축소
23일(현지 시각) 영국 BBC 방송은 익명을 요구한 사우디 정부 고문의 말을 인용해 “사우디 정부가 조만간 네옴시티 계획을 재검토해 결정을 내릴 것”이라며 “정부 방침은 여러 요소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재조정이 이뤄진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전했다. 그는 일부 사업은 연기되거나 규모가 축소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BBC는 “지난해 7월 방송된 TV 다큐멘터리에서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대형 프로젝트들에 회의적인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면서 “약 1년이 지난 지금, 일부 의혹은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고 했다.
네옴시티는 빈 살만 왕세자가 2017년 발표한 탈(脫)탄소 국가 발전 계획 ‘비전 2030′의 핵심 사업으로, 홍해와 인접한 사막과 산악지대에 서울의 44배 넓이(2만6,500㎢)로 친환경 스마트 도시 등을 지어 석유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구상으로 시작됐다. 네옴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은 길이 170km·폭 200m·높이 500m의 거대한 직선형 구조물을 세우는 ‘더 라인’이다.
그러나 BBC는 “원래 사우디의 계획은 네옴시티를 170km 길이로 완성해 그곳에 90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프로젝트 개발자들은 2030년까지 2.4km만 완료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 4월 블룸버그도 “사우디 당국자들은 170km에 이르는 더 라인 전체 구간 중 2030년까지 완공될 수 있는 부분은 2.4km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알리 시하비 네옴시티 자문위원회 위원은 비전 2030의 사업들이 “일부러 과장된 수준으로 설계됐었다”고 말했다. 그는 “해당 계획들은 원래 욕심이 과한 수준으로 제작되었으며 사우디 역시 계획 중 일부만 제때 완성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완성된 부분만으로도 대단한 수준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정적자에 휘청, PIF 현금도 급감
네옴시티 사업 계획이 축소된 배경에는 국제유가가 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치솟았던 국제유가가 진정되면서 사우디 정부의 자금난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BBC는 “최근 저유가로 정부 수입이 타격을 받으면서 사우디가 네옴 사업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자금 조달 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수준은 돼야 사우디가 대형 프로젝트에 필요한 사업 자금을 충분히 조달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국제 유가는 미국의 원유 생산량 증가, 고금리로 인한 수요 둔화 등이 겹치면서 좀처럼 오르지 않아 80달러 안팎에서 거래되고 있다.
이에 사우디는 현재 재정 적자에 빠진 상황이다. 사우디 재무부는 지난 5월 성명에서 올해 1분기 사우디 재정적자 규모는 124억 리얄(약 4조7,0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4배 이상 늘어나 6개 분기 연속 재정적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사우디 정부는 올해 790억 리얄(약 30조1,200억원) 재정적자에 이어 내년과 내후년에도 재정적자가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사우디국부펀드(PIF) 현금도 급감하고 있다. 네옴시티 관련 예산은 대부분 PIF에서 지분 투자 형태로 조달되는데, 지난해 9월 기준 PIF 현금은 150억 달러(약 20조원)로 2022년(500억 달러)과 비교하면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이에 사우디 정부는 PIF 자금 조달을 위해 외국인 투자자에게 국채를 대거 발행하는 한편,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 주식 약 112억 달러어치를 매각해 PIF에 차익을 안겨줬다. 그럼에도 PIF가 네옴 프로젝트 등 사우디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프로젝트에 지출하는 금액은 올해 400억~500억 달러선에서 내년 이후 연간 700억 달러(약 97조원)를 넘어설 전망이다.
이에 대해 미국 싱크탱크 아랍걸프국가연구소의 팀 캘런 연구원은 “PIF가 필요한 자금을 대는 것은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라며 “사우디 정부가 국채 발행으로 PIF에 자금을 공급하고 있는데, 해외 투자자들의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우디 정부는 투자자들이 보기에도 욕심이 과해 보이는 사업을 놓고 투자자들을 상대로 설득해야 하는데, 이는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했다.
확장된 야망에 중국 투자자들도 외면
네옴은 빈 살만의 외국인 투자 유치 계획 중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로 꼽힌다. 네옴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네오(NEO)'와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의 이름 첫 글자(M)를 합성한 것이다. 공개된 네옴의 계획과 홍보물을 살펴보면 하나의 대규모 개발에 모든 것을 포함된 꿈의 도시 그 자체다. 그중에서도 네옴의 중심 명소 더 라인은 사우디 국기의 칼처럼 홍해에서 깊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170km의 선형 도시로, 반사 소재로 덮인 모습으로 구상했다. 인공 달과 드론 함대, 그리고 인구의 50%를 서비스 로봇으로 채우겠다는 제안도 있었다.
초기만 해도 자문위원회에는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와 구글의 보도 연구소 CEO인 댄 닥터로프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유명 자문위원 대부분이 프로젝트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다 이제는 착공이 시작되자마자 중심 계획이 축소됐다는 발표가 나온다. 더 라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리에 2.4km 길이의 훨씬 작은 도시가 계획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더 라인의 당초 야망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에 불과하다. 결국 라인 프로젝트 자체가 지속 불가능하고 아집에 사로잡힌 이상한 판타지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다. 지구 온난화 시대에 여름 낮 기온이 이미 50℃를 넘어서는 지역에 네옴이 건설된다는 점이 단적인 예다.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고 때로는 격동적인 지역 중 하나에 건설된다는 점도 투자자들의 발길을 돌리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네옴 시티 관련 임원들이 최근 중국 베이징·상하이, 홍콩에서 잇따라 로드쇼를 개최하고 잠재적인 투자자들을 만났으나 주요 계약 체결 소식은 1건도 전해지지 않았다. 네옴시티 사업을 둘러싸고 실행력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홍콩 혁신기술개발협회(HKITDA)의 레너드 챈 회장은 “네옴시티 로드쇼를 참관한 홍콩 투자자들의 반응이 ‘중립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AFP통신에 “재미로 방문은 하겠지만 그곳에 살지는 않을 것”이라며 “그건 마치 (게임) 심시티에서 나온 뭔가와 같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