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물러선 미국” ESTA로도 B-1 비자와 동일 활동 가능, 韓비자 전담데스크 설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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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B-1 소지자와 동일 활동 가능 재확인” 주한 미 대사관에 ‘투자기업 전담 데스크’ 설치 사안에 대한 미국 측 관심 반영

미국이 전자여행허가(ESTA) 비자로도 단기 상용(B-1)비자 소지자와 동일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재확인하고 이를 대외 창구를 통해 공지하기로 했다. 또 주한미국대사관에 대미 투자기업들이 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 않게 전담 데스크(가칭 ‘Korean Investor Desk’)도 설치하기로 했다. 한국 국적자 300여 명이 미국 이민 단속 구치소에 일주일간 갇혔던 ‘조지아 구금 사태’가 다시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로, 이로써 대미 투자 한국 기업의 비자 문제는 급한 불을 끄게 됐다.
美 국무부, 韓 인력 핵심역할 강조
지난달 30일(이하 현지시각)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한미 양국 정부 간 상용 방문 및 비자 워킹그룹 첫 회의 결과 이러한 대책 마련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회의에서 양국은 한국 기업의 활동 수요에 따라 단기 상용 비자인 B-1 비자로 가능한 활동도 명확히 했다. 대미 투자 과정에서 수반되는 해외 구매 장비의 △설치(install) △점검(service) △보수(repair) 활동이 B-1 비자 소지자에게 허가되며, ESTA를 받은 이 또한 B-1 비자 소지자와 동일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앞서 지난 4일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체포된 한국인 대다수는 B-1·2(비즈니스 목적의 단기 상용비자와 관광비자를 합친 비자) 혹은 ESTA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구금됐는데, 유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도를 미국 측이 명확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어 외교부는 “양국은 미국에 있는 한국 공관들과 미국 이민법 집행기관 간 협력 체계를 구축하자는 한국 측 제안에 따라 한국 공관과 미 이민세관단속국(ICE)·관세국경보호청(CBP) 지부 간 상호 접촉선을 구축,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또 한국은 이번에 발표된 개선 조치를 넘어 근본적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는데, 이에 미국 측은 “현실적으로 입법적인 제약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과제”라면서도 “가능한 방안을 계속 검토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의 발표에 앞서 미 국무부도 관련 보도자료를 내고, 크리스토퍼 랜도 미 국무부 부장관이 회의 모두발언에서 "한국이 미국의 주요 투자국의 하나"라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국무부는 이어 "랜도 부장관이 특히 한국으로부터의 투자를 환영하고 장려한다는 미국의 약속을 재확인했으며, 이러한 투자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숙련된 인력의 핵심 역할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국무부의 2인자인 랜도 부장관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해당 사안에 대한 미국 측의 관심도를 보여준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국무부는 "미국 정부 각 부처 대표가 회의에 참여해 이 계획에 대한 폭넓은 의지를 보여줬다"고 말을 이었다. 국무부는 "미국은 미국의 산업 재건을 이끌고 한미동맹을 강화하며 공동 번영을 증진하는 투자를 강력히 지지한다"며 "미국 정부는 미국 법률에 따라 자격을 갖춘 한국 방문자가 미국에 계속 투자할 수 있도록 적절한 비자를 처리하는 것을 포함해 한미 무역·투자 파트너십을 증진하기 위해 동맹인 한국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암참 "한국인 전문직 전용 美비자 필요"
이번 양국 합의는 조지아 한국인 구금 사태를 계기로 미국에서 한국인 전용 전문직 비자가 신설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데 따른 것이다. 지난달 29일 정만석 이민법인 대양 미국 변호사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주최로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비자 제도 세미나’에서 “대미 투자가 사상 최대에 이른 지금이 바로 행동해야 할 시기”라며 미국 의회에 계류 중인 ‘한국동반자법(Partner with Korea Act)’ 통과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동반자법은 한국인 전문인력에만 연 1만5,000개의 쿼터를 배정하는 E-4 비자를 신설하는 법안이다. 2013년부터 미 의회에 매회기마다 꾸준히 발의됐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번번이 기간 만료 폐기됐다.
정 변호사는 “H-1B(전문직 비자), H-2B(비농업 단기근로), L-1(주재원 비자), E-2(투자 비자) 등 합법적인 비자는 발급에 제약이 많고, B-1이나 ESTA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며 “기업들을 어쩔 수 없이 편법으로 내모는 현 제도의 취약성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동반자법은 미국의 고용과 경제 공급망을 강화하고, 나아가 한미 동맹 차원의 협력을 증폭시키는 전략적인 법안”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한국동반자법 통과는 미 정부뿐만 아니라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있어야 실현될 수 있다. 이에 정 변호사는 단기적인 해법으로 한국 정부가 미국 측에 △반도체·배터리 공장 등 특정 대규모 프로젝트에 비자 심사 탄력성 부여 △B-1 비자에 따른 단기 기술 지원 허용 범위 확대 등을 요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두 법안 통과 없이 미 정부의 행정지침만으로 가능한 사안이다.
또 한국 기업들도 직무에 맞춰 비자를 분산 신청하고, 기존의 원하청 고용 구조도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 변호사는 “한국에선 대규모 제조 건설 프로젝트에서 원하청 구조가 일반화 돼있지만, 미국 이민법에서 비자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만을 전제로 하고 있다”며 “하청업체 인력에 대해선 미국 현지 법인이 직접 고용주로 등록해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슴 쓸어내린 기업들 "급한 불 꺼 다행"
한미 양국이 ESTA 비자와 B-1 비자로도 미국 내 장비 설치·보수 등이 가능하다는 점을 재확인하면서 국내 기업들도 안도하는 분위기다. 이로써 조지아 구금 사태 이후 27일 만에 미국에 투자한 한국 기업들의 비자 문제는 급한 불은 끄게 됐다. 특히 배터리업계는 이번 합의로 일선 협력업체들의 업무 보폭도 커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행 규정상 출장 시 ESTA와 B-1 비자를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상당수 업체들은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ESTA를 통한 출장은 자제해 왔다. 비자 문제에 대한 보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번 양국 합의로 배터리 협력업체들은 이전보다 현지 인력 파견이 수월해질 전망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국내 4대 그룹 계열사인 배터리 3사 외에는 비자를 발급 받는 것이 어려웠다”면서 “3사의 사업 파트너인 영세업체들이 현지에 인원을 보내는 것이 수월해지게 됐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배터리 설비나 장비 관련 협력사들은 ESTA 의존도가 높았다”면서 “설비 건설에 이들의 역량이 꼭 필요한 만큼 현지에서 사업을 전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에 따라 향후 국내 대규모 인력 파견이 불가피한 조선업계도 일단 가슴을 쓸어 내리며 향후 논의에 주목하고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마스가가 구체화되면 미국 내 야드(조선 작업장) 확충 등이 필요하고 이때 국내 조선 인력들이 미국에 대거 파견돼야 한다”며 “여전히 불확실성이 높지만 비자 문제가 확실히 해결되면 조선사들도 인력 파견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