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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재 수요 대부분을 차지하는 G2 경기 침체 우려 확산
극심한 내수 부진 시달리는 중국 '덤핑' 공세에 속수무책
수요에 공급 요인까지 맞물려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세'
미국과 중국이 동반 경기 침체에 빠질 거라는 우려가 확산하면서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지난 2022년 원자재 가격 하락 당시에는 팬데믹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외생 변인이 영향을 미쳤지만, 지금은 주요 2개국(G2)의 경기 침체 등 수요 요인에 더해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라는 공급 요인이 맞물리면서 원자재 가격 하락세가 길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헤지펀드, 美·中 경기 침체 우려에 원자재 매도
12일 블룸버그통신이 미국 상품선물위원회(CFTC) 데이터를 집계한 결과 미국 헤지펀드는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6일까지 원유, 금속, 곡물 등 20개 원자재 선물·옵션에 15만3,000개의 순매도 포지션을 취했다. 자본시장이 원자재 가격 하락에 베팅했다는 뜻으로, 원자재 파생상품 시장이 순매수에서 순매도로 전환한 것은 2016년 초 이후 처음이다. 아울러 순매도 규모는 2011년 이후 최대다.
24개 원자재 가격을 추종하는 블룸버그 원자재 지수(BCOM)는 이날 한 달 전 대비 5.1% 하락한 95.61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구리는 11.23%, 철광석은 6.88% 하락했고 옥수수(-7.18%), 대두(-5.15%) 등 농산물도 내림세를 나타냈다. 지난 5일 서부텍사스원유(WTI)와 브렌트유가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7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원유 가격도 약세를 보였다. 이는 수요 감소에 기인한 것으로 LSEG오일리서치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의 7월 원유 수입은 중국과 인도의 수요 약화로 2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특히 국제 수요를 이끄는 미국과 중국이 동반 침체에 빠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면서 원자재 매도세를 촉발했다. 철광석, 알루미늄 등 원자재 가격은 지난해 말 중국 부동산 위기 이후 하락세를 나타냈다. 여기에 실업률 등 경제지표가 미국 내 경기 침체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 금속·농산물 가격이 급락했다는 분석이다. 블룸버그는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공급 차질과 원자재 슈퍼사이클에 대한 기대가 투기 세력을 기록적인 강세 베팅으로 몰아넣었다"며 "하지만 최근 이러한 추세에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리튬·니켈 등 희소금속 가격, 고점 찍고 하락세
블룸버그통신의 설명대로 코로나19 봉쇄가 끝난 이후 글로벌 경제의 회복세와 함께 주요국이 경쟁적으로 친환경 전환에 뛰어들면서 3년여간 원자재 가격이 상승세를 보였다. 이 시기 희소금속·에너지·농산물 가격이 상승했고, BCOM도 2020년 1월 60.89에서 2022년 5월 131.34로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이에 당시 시장에서는 슈퍼사이클에 진입할 것이란 전망이 팽배했다. 슈퍼사이클은 수요 급증으로 수년 혹은 수십 년간 이어진 장기적인 가격 상승 추세를 의미하는데 1970년대 오일 쇼크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2022년 말 전기차 시장이 위축되면서 반전을 맞았다. 2022년 10월 1톤당 59만7,500위안(약 1억1,500만원)까지 올랐던 리튬 가격이 이듬해 4월 4분의 1인 17만2,500위안(약 3,300만원)으로 급락하는 등 리튬·니켈 등 희소금속 가격은 고점을 찍고 일제히 하락세로 돌아섰다. 이후 일시적으로 반등했지만 현재는 전기차 캐즘(chasm, 일시적 수요 둔화)을 이기지 못하고 7만7,500위안(약 1,500만원)까지 하락했다. 철·알루미늄 등 산업 금속 가격도 세계 최대 철강 소비국인 중국 부동산개발업체의 연쇄 도산 이후 줄곧 하락하고 있다. 특히 철광석 가격은 지난 1월 톤당 144.16달러에서 이날 101.26달러로 29.75% 떨어졌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필수 소재인 구리도 중국 수요 부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11월 파운드당 3.64달러에 거래된 구리 가격은 5월 5.11달러까지 올랐다가 최근 다시 3달러대로 하락했다. 농산물 가격도 고꾸라졌다. 중국인의 돼지고기 소비량이 감소하면서 사료로 쓰이는 대두와 옥수수 가격이 올 들어 20%가량 하락한 것이다.
희토류부터 범용 플라스틱까지 중국발 과잉공급
이처럼 중국은 세계 최대의 원자재 소비국이자 주요 원자재의 생산국으로 중국의 경기 침체는 원자재 시장의 공급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극심한 내수 침체를 겪고 있는 중국이 덤핑 공세로 재고까지 밀어내면서 세계 각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철강업종의 경우 중국이 자국에 남아도는 철강을 저가로 수출해 세계적으로 1억 톤의 공급 과잉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각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 장벽을 세우며 방어하고 있다. 지난 4월 22일 칠레가 중국산 철강에 최대 33.5%에 달하는 반덤핑 관세를 부과한 것이 대표적이다.
'17종의 희귀한 광물'을 뜻하는 희토류도 전 세계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중국의 과잉 공급으로 희귀성을 잃었다. 중국 정부는 최근 몇 년간 6대 국유기업에 배분하는 희토류 채굴 쿼터를 크게 늘렸다. 지난해 생산 쿼터는 전년 대비 21% 증가한 25만5,000톤을 배정했고 올해 상반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12.5% 증가한 13만5,000톤을 할당했다. 늘어난 물량은 저가 공세로 이어졌다. 원자재 정보업체 아거스미디어에 따르면 지난달 12일 기준 네오디뮴과 디스프로슘의 가격은 각각 전년 대비 23%, 24%씩 하락했다.
한국의 주요 수출 종목이었던 석유화학도 중국 기업의 증설로 인한 공급 과잉을 비롯해, 경기 부진에 따른 수요 둔화로 고전하고 있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4월 저가 공세를 이어가는 중국산 스티렌모노머(SM)에 대한 반덤핑 조사에 나섰다. 중국에서 과잉 생산된 폴리에틸렌(PE)·폴리프로필렌(PP) 등 범용 플라스틱이 초저가 제품 생산에 활용돼 글로벌 전자상거래 시장의 가격 경쟁을 촉발하는 나비효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실제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등이 공급하는 저렴한 공산품 중 상당수가 값싼 범용 플라스틱을 주재료로 한다.
철강 등 저가 공세에 '제2의 차이나쇼크' 우려
이런 가운데 시장에서는 중국의 원재료 과잉 생산과 초저가 완제품 수출이 세계 무역 시장을 뒤흔드는 '제2의 차이나 쇼크'가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값싼 중국산 제품이 글로벌 시장을 휩쓸던 차이나 쇼크가 20여 년 만에 재현될 것이라는 우려다. 당시 중국은 저렴한 인건비를 내세워 철광석, 석탄 등 원자재를 수입해 가공·생산하는 '세계의 공장’'이 됐지만 지금은 플라스틱, 철강 등 원재료부터 전기차용 배터리, 완성차까지 공급망 전반을 손에 쥐고 세계 각국에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을 수출하고 있다.
저가 물량 공세를 펼치는 건 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일례로 전기차 배터리 핵심 원료인 니켈의 가격 폭락세가 지속되는 와중에 '니켈 천국'이라 불리는 인도네시아의 저가·물량 공세로 니켈 사업의 수익성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올해 초 블룸버그통신은 "글로벌 광산기업이 인도네시아로부터 거의 무한정의 저가 물량 공세라는 실존적인 위협에 직면했다"며 "저품질 니켈을 생산해 오던 인도네시아가 과잉 생산한 니켈을 전기차 배터리에 쓰이는 고품질 제품으로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니켈 사업의 철수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다만 업종에 따라서는 원자재 가격 하락이 호재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선박 가격의 상승세로 슈퍼사이클을 맞은 조선업계의 경우 철강업체와의 협상에서 건조 비용의 20%를 차지하는 후판 가격의 인하에 합의하면서 원자재 비용이 상당 부분 절감될 것으로 보인다. 원가율 91.5%에 이르는 건설업계도 한 때 건설자재 가격이 역대 최고 수준으로 급등하면서 위험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최근 철근 등 일부 품목이 하락하면서 점차 안정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