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대출금리 인상 대신 예금금리 내린다, 예대마진 확대
"금리 인하 전에 막차 타자" 은행 정기예금에 뭉칫돈
긴축 시대 저무는데, 한국 빚 3,000조 돌파 '진퇴양난'
기준금리 인하 기대 속에 은행권 예금금리가 줄줄이 떨어지지만, 대출금리는 오르는 기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은행들이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관리 압박에 지난 7월부터 가계대출 금리를 여러 차례 끌어올린 영향이다. 이달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본격적으로 정책금리 인하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시장금리가 계속 하락하고 대출이 잡히지 않으면 은행권 예대차익(대출금리-예금금리)만 더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시중은행, 예금 금리 줄인하
4일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지난달 30일 예·적금 금리를 최대 0.2%포인트 인하했다. 하나은행의 정기예금 기본금리도 24개월 이상 2.70%, 36개월 이상 2.80%에서 0.10%포인트씩 내린 2.60%와 2.70%로 조정됐다. 내맘적금(자유적립식)의 경우 가입 기간(6개월~60개월)에 따라 금리가 2.60~3.00%에서 2.40~2.80%로 0.2%포인트씩 하향 조정됐다.
같은 달 31일 케이뱅크도 주요 적금 상품 금리를 최대 연 0.20%포인트 인하했다. 코드K자유적금 기본금리는 가입 기간(1개월~3년)에 따라 3.30~4.10%에서 3.20~3.90%로, 주거래우대 자유적금 금리는 가입 기간(6개월~3년)에 따라 3.50~4.00%에서 3.40~3.80%로 낮아졌다. 앞서 신한은행 역시 지난달 2일 수신 상품의 기본금리(가산금리 등 제외)를 최대 0.20%p 일제히 낮췄고 뒤이어 KB국민은행과 NH농협은행도 같은 달 5일 예·적금 상품 기본금리를 내렸다.
반면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오름세다.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의 지난달 30일 기준 주담대 혼합형 금리(은행채 5년물 기준)는 3.850~5.736%로, 같은 달 2일과 비교하면 하단과 상단이 각각 0.820%포인트와 0.532%포인트씩 상승했다. 변동금리도 신규코픽스 기준 4.590~6.541%로 하단이 0.560%포인트 올랐다. 변동금리의 지표인 코픽스가 3.520%에서 3.420%로 0.100%포인트 하락했음에도 변동금리 하단은 오히려 상승한 셈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가계대출 억제 정책으로 대출을 마음껏 늘리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예금 금리를 높여가며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기예금 막차 수요 쏠림, 7~8월 증가폭 34조원
은행권이 예금금리를 잇달아 내리자 주요 시중은행의 정기예금으로 막차 수요가 몰리고 있다. 은행권에 따르면 지난달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정기예금 잔액은 925조6,659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달(909조3,806억원)과 비교해 16조2,853억원이 늘었다. 정기예금 잔액은 올해 4월까지 하락하다 5월(16조8,242억원), 6월(1조4,462억원), 7월(18조2,282억원)에 이어 4개월 연속 증가세를 보였다. 정기적금의 경우도 지난달 잔액이 36조7,917억원으로, 전달 대비 1조602억원 늘었다. 3월까지 감소세였던 정기적금은 4월부터 증가세로 돌아선 뒤 매월 1조원 이상씩 불어나고 있다.
올해 7월에 이어 8월에도 정기예금의 자금이 급증한 것은 비록 정기예금 금리가 이미 기준금리 수준 이하로 내려갔지만 향후 금리 인하기에 접어들 경우를 고려하면 지금이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를 적용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으로 해석된다.
저금리에 만족하지 못한 시중 자금은 증시와 부동산으로 향하고 있다. 코스피지수가 8% 넘게 폭락한 지난달 5일의 이른바 ‘블랙 먼데이’ 하루 동안 5대 은행에서만 2조366억원에 달하는 요구불예금(수시입출식 예금 포함)이 빠져나갔다. 반면 증시 대기 자금인 투자자 예탁금은 블랙 먼데이에만 5조6,197억원 증가했다.
나라·가계빚 첫 3,000조 돌파 ‘통화 정책’ 딜레마
은행의 예금금리 인하 배경엔 미국의 금리인하 개시에 대한 기대가 자리하고 있다. 오는 9월 열리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연준이 금리를 인하하면 연내 한국은행도 금리를 인하할 것이란 예상이 우세한 상황에 굳이 예금금리 경쟁을 벌이며 자금을 유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빚의 역습에 발목 잡힌 상황에서 한은이 미국 금리 인하에 맞춰 피벗을 결정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정부와 가계 빚의 합은 올해 2분기 기준 처음으로 3,000조원을 넘어섰다. 이는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인 2,401조원의 127%에 달하는 규모로, 감세 기조에 따라 세수가 줄면서 국채 발행이 늘었고 부동산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가계대출이 급증한 결과다.
현시점 국내 5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증가폭은 코로나19 유행 초기였던 2021년 ‘0%대 기준금리’ 시대의 기록도 넘어선 상태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지난 8월 22일 통화정책 방향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기준금리(3.50%)를 동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해 2월 이후 13차례 연속으로 금리를 묶으면서 한은은 설립 이래 가장 긴 연속 동결 기록을 썼다.
기준 금리 인하가 저축 대신 소비와 투자 유인을 키워 경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소비나 투자보다 부동산 시장에 돈이 더 쏠릴 경우 가뜩이나 위험수위에 올라 있는 가계부채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커진다. 앞서 이창용 한은 총재도 “이자율을 낮춘다든지 유동성을 과잉 공급하면서 부동산 가격 상승 심리를 자극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며 “(영끌족에 대해선) 정부의 공급 대책으로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는 건 제약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기준금리 동결 이후 정부·여당을 중심으로 불만이 쏟아지자, 이 총재는 지난달 27일 한은·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공동 심포지엄에서 “왜 우리가 금리 인하를 망설여야 할 만큼 높은 가계부채와 수도권 부동산 가격의 늪에 빠지게 됐는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구조적 개혁 없이 손쉬운 금리 조정으로 부동산과 가계 빚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법을 지적한 것이다.
다만 반대로 금리 인하가 너무 늦어지면 내수 회복이 지연돼 성장 동력이 약화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 최근 6개월째 자영업자 수가 감소하는 등 내수 부진이 심화하면서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서민들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해외 중앙은행들의 긴축 종료 시그널로 인해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면서 물가 상승 부담도 늘어날 것으로 점쳐진다. 내수 부진과 가계부채 증가의 딜레마에 빠진 상황에 정치권의 압박까지 더해진 한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