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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외 투자 자산 축적으로 심각한 환율 리스크 직면
엔화 절상 우려에 인플레이션 대응 위한 금리 인상도 “족쇄”
‘엔-달러화 고정 환율제’ 주장 “힘 얻어”
[동아시아포럼] 섹션은 EAST ASIA FORUM에서 전하는 동아시아 정책 동향을 담았습니다. EAST ASIA FORUM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크로퍼드 공공정책대학(Crawford School of Public Policy) 산하의 공공정책과 관련된 정치, 경제, 비즈니스, 법률, 안보,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분석 플랫폼입니다. 저희 폴리시 이코노미(Policy Economy)와 영어 원문 공개 조건으로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일본은 국내 경제는 물론 글로벌 시장까지 위협하는 엔화 환율 변동이라는 불확실성과 씨름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금리 인상이 초래한 엔화 가치 절상과 이로 인한 세계 금융 혼란은 물가 조절과 환율 안정 사이에서 외줄타기해야 하는 일본의 위태로운 상황을 그대로 노출했다. 일본 내부에서는 이번 기회에 엔화를 달러화에 연동시키는 달러 페그제(dollar peg system)를 시행하자는 목소리가 일부 경제학자와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다.
일본 금리 인상 발표, 엔화 절상으로 이어지며 세계 금융 시장 “흔들”
올해 8월 초 갑작스러운 일본은행(Bank of Japan)의 금리 인상과 양적 완화 축소 발표는 세계 금융 시장을 순식간에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은 바 있다. 물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한 금리 인상은 뒤이은 미국 고용시장 위축 소식과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Federal Reserve)의 금리 인하 전망과 함께 글로벌 시장에 충격파를 던졌다. 금리 인상이 바로 엔화 가치 절상으로 이어지며 캐리 트레이드(carry trades,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수익성이 높은 외화 표시 자산에 투자) 투자자들이 서둘러 외화 자산을 팔아 엔화 대출 상환에 나서며 시장이 대혼란에 빠진 것이다.
일본은행은 추가 금리 인상을 보류하고 시장은 안정됐지만 이 사건으로 일본의 엔-달러 환율 변동과 캐리 트레이드가 글로벌 금융 시장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이 재조명됐다. 동시에 엔화를 달러화에 연동시켜 인플레이션 위험과 환율 변동성을 동시에 해결하자는 방안이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일본, 90년대 이후 경기 침체 극복 위해 장기간 저금리 유지
일본의 엔-달러 환율은 낮은 엔화 가치로 일본의 무역 흑자가 급격히 상승하던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격동의 역사를 가졌다. 일본의 증가하는 무역 흑자는 교역 상대국들, 그중에서도 미국의 심기를 거슬렸고 일본은 불공정 무역 관행의 주범으로 지목되기 시작한다. 급기야 G5(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 국가들이 모인 1985년 플라자 합의(Plaza Agreement)를 통해 일본은 대미 무역 흑자 축소를 위한 대 달러화 엔화 절상에 합의하기에 이르고, 이로 인한 급격한 엔화 매수와 가치 절상은 일본의 수출 경쟁력을 갉아먹어 이때부터 일본의 경제 위기가 전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1990년대 일본의 경기 침체가 본격화하면서 95년에 시작한 엔화 가치 절하는 한국과 태국 등 이웃 국가들의 경쟁력 하락을 불러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Asian Financial Crisis)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당시 동남아시아에 대거 융자했던 일본 은행들은 심각한 손실을 기록하고 98년 일본 금융 위기와 연결된다. 이때부터 일본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장기간 지속될 저금리 정책과 양적 완화를 채택하는데, 값이 싼 엔화를 빌려 고금리를 보장하는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드가 자리를 잡은 것도 이 시기다.
저금리로 인한 해외 투자 자산 증가, 심각한 환율 리스크 불러
점점 더 많은 일본 내 기관 투자자와 개인 투자자들이 낮은 금리가 영속화되다시피 한 일본보다는 해외 투자에 눈길을 돌렸다. 일본의 개인 외환 거래자를 상징하는 ‘와타나베 여사’(Mrs Watanabe)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늘어난 일본의 해외 투자 자산은 작년에 3조 4천억 달러(약 4,728조원) 규모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거대 규모의 외화 표시 자산 때문에 일본은 엄청난 환율 변동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급격히 증가한 일본 노령 인구들이 주로 의존하는 연금 기금(pension fund)의 상당 부분이 해외에 투자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들어 일본의 통화 정책은 소비자 물가 인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은행이 장기간 시행한 저금리 정책은 엔화 가치를 낮게 유지해 일본의 수출주도형 경제에 기여해 왔지만 2022년 이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일본은행의 정책 목표인 2%를 지속적으로 넘어서며 일본은행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은 엔화 가치 절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대규모 해외 보유 자산의 가치 하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저금리 유지는 소비자 물가 상승을 방임하는 것으로 이미 고물가에 시달리는 일본 소비자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이시바 시게루(Ishiba Shigeru) 일본 총리와 정부 관료들은 경제 회복과 저성장 탈피를 위한 저금리와 양적 완화 위주의 통화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이미 일본의 경제 구조는 장기간에 걸친 저금리에 익숙해져 제조업은 물론 금융 산업과 연금 기금까지 엔화 약세에 의존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특히 생명 보험 회사와 연금 기금은 해외 자산 투자 비중이 매우 높아 갑작스러운 엔화 절상에 취약한 상태다. 정부연금투자기금(Government Pension Investment Fund)의 경우 1조 7천억 달러(약 2,364조원) 규모의 보유 자산 중 절반가량이 해외에 투자돼 있다.
‘엔-달러화 고정환율제’로 환율 리스크 최소화가 “답”
이렇게 환율과 인플레이션 사이에서 외줄타기하는 상황이 이어지며 일부 정책 결정자와 경제학자는 엔화를 달러화에 고정하는 달러 페그제(dollar peg system)를 제안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정 환율제가 주는 이점은 명확하다. 우선 일본 경제에 지속적으로 혼란을 초래해온 종잡을 수 없는 엔화 가치 변동을 잡을 수 있다. 엔-달러 환율이 안정화되면 일본 소비자들과 해외 자산에 극심하게 의존하고 있는 연금 생활자들이 환율 변동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엔-달러 고정환율제는 환율 변동으로 인한 해외 투자 자산의 가치 하락 리스크를 최소화할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에 고정환율제를 통해 일본의 금융 정책을 미국과 연동시킴으로써 일본은행의 통화 정책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경감할 수 있다.
물론 달러 고정환율제 도입은 일본이 장기간 의존해 온 일본은행의 통화정책 자율성을 일부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일본의 금리 인상이 극소 규모에 그친 것에서 드러나듯 일본의 통화 정책 자체가 이미 발이 묶여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일본은행은 고정환율제 유지에 정책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그간 통화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정치 집단이나 압력 단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제 엔-달러 고정 환율제 채택 여부는 특정 경제 제도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상호 의존성과 변동성이 심화되는 글로벌 시장에서 금융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 중 하나로 거론되는 상황이 됐다.
원문의 저자는 군터 슈나블(Gunther Schnabl) 라이프치히대학교(Leipzig University) 교수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Exchange rate uncertainty endangers Japan’s economic stability | EAST ASIA FORUM에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