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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증·과잉 진료 항목 중심으로 제한
비급여 증가에 건보 보장률 제자리걸음
의료계에 실손보험 부실 책임 묻는 보험계
정부가 그간 과잉 진료의 원인으로 지적돼 온 혼합진료를 최소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를 위해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는 급여 진료와 민간 실손보험이 보장하는 비급여 진료를 동시에 받는 혼합진료 후에는 보험금 청구가 제한된다. 일부 진료 과목에 쏠림 현상을 막고, 필수 의료 체계를 되살리겠다는 취지다. 나아가 실손보험 가입자가 불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남용하는 행태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다.
환자 부담 진료비 늘려 비급여 진료 최소화
27일 대통령실과 정부에 따르면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특위)는 연내 발표할 실손보험 제도 개선 방안에 혼합진료 금지 조항을 포함할 방침이다. 구체적으로는 건강보험공단이나 보험회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도록 규정해 혼합진료를 사실상 금지한다는 설명이다. 혼합진료에 따른 과다 청구를 제한하려는 취지로, 환자가 지불해야 할 진료비가 늘어나면 비급여 진료가 감소할 것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이를 위해 특위는 혼합진료 시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을 실손보험 상품 약관에 포함하도록 정부 지침을 마련할 계획이다. 다만 모든 비급여 항목이 아닌, 경증이면서 과잉 청구된 항목 중심으로 제한할 방침이다. 최근 급격히 늘어난 도수치료를 비롯해 백내장 수술 시 다초점렌즈 삽입술을 병행하는 것이 대표적 예다.
나아가 정부는 의료법과 건강보험법 등에도 혼합진료 금지에 관한 법적 근거를 담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또 의료기관마다 천차만별인 비급여 서비스 가격을 정부가 주기적으로 공시하는 ‘참조 가격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유력 검토 중이며, 비급여 진료 비용을 사실상 무제한 보장받을 수 있는 1·2세대 실손의료보험 개편도 이번 개선 방안에 포함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이와 같은 조처에 나선 것은 그간 의료 현장에서 보험 약관상의 허점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편취한 사례가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청주시 상당구에서 병원을 운영한 의사 A씨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입원 보험금을 노린 환자 18명과 원무과장 B씨를 입원시켜 주고 공단에 병원 몫의 요양급여비를 청구해 약 3,000만원을 편취한 혐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B씨와 환자들은 A씨가 발급해준 입·퇴원 확인서 등을 보험회사에 제출해 약 1억6,000만원의 보험금을 수령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A씨는 사기·사기방조·보험사기방지특별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청주지법 형사6단독 조현선 부장판사는 그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조 부장판사는 “보험사기는 전체 보험료 인상의 원인이 되는 심각한 범죄”라며 “피고 A씨는 의사의 권한을 악용, 부당하게 보험금을 타내려는 환자들의 범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이어 “피해를 본 보험 회사가 많고 피해 규모 역시 상당한데도 피고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어 죄질이 좋지 않다”고 판시했다.
OECD 최저에 가까운 건강보험 보장률
이같은 사례가 속출하며 전문가들 사이에선 의료 개혁이 공적 보험의 보장 범위를 넓히고 비급여 난립을 막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한국 의료제도의 고질병인 낮은 건강보험 보장률은 그대로 둔 채, 일부 정책이 환자의 병원비 부담을 늘리는 방향으로만 전개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 전체 의료비 지출에서 건강보험 급여가 차지하는 비중(보장률)은 64.5%였다. 건강보험 보장률은 2013년 62.0%에서 2020년 65.3%로 증가했다가 2021년과 2022년에는 각각 64.5%로 다시 떨어지는 등 9년 사이 2.5%p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는 해외 주요국 공적 보험의 의료비 보장률과 비교해 가장 낮은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의하면 회원국 평균 보장률은 76%(2021년 기준)다. 관련 자료를 제출한 36개국 중 한국보다 낮은 보장률을 기록한 곳은 브라질(41%)이 유일했다.
반대로 비급여 진료는 빠르게 늘었다. 2013부터 2022년까지 건강보험 가입자들이 비급여 진료에 지출한 돈(건보공단 추산치)은 11조2,000억원에서 17조6,000억원으로 뛰며 1.6배 증가했다. 건강보험이 재정 지출을 확대해도, 비급여 때문에 전체 진료비가 늘면서 보장률은 제자리걸음을 한 셈이다.
국민들은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비급여 진료비를 실손보험을 이용해 메우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실손보험 가입자는 3,997만 명으로 2015년(3,266만 명) 대비 22.4% 늘었다. 같은 기간 실손보험이 지급한 보험금도 5조5,000억원에서 14조1,000억원으로 2.6배 뛰었다. 건강보험의 보장 범위가 제한된 상황에서 환자는 의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실손보험에 가입하고, 의료기관은 비급여 진료를 권장해 의료비 지출이 더 커지는 악순환이 발생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무처장은 “비급여의 급여화 등을 통해 건강보험 보장성을 제고하려는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OECD 평균보다 의사 수가 부족한 것보다 건강보험 보장률이 매우 낮다는 게 한국 의료의 진짜 문제”라고 일갈했다.
임의 비급여 논란 ‘현재진행형’
비급여 진료의 범위 설정 또한 난제다. 임의 비급여를 법정 비급여로 기재하는 것과 관련해 보험사와 의료계 간 공방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사실 임의 비급여는 공식적 정의가 없다. 의료계와 보건당국이 관행적으로 사용해 오던 용어로, 의료기관이 급여 또는 비급여 어느 것으로도 규정돼 있지 않은 의료행위를 한 후 임의로 (법정) 비급여인 것처럼 환자에게 진료비를 부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보험업계는 이런 임의 비급여 진료 행위가 안전성 및 유효성 검증이 충분치 않고, 법제화가 되지 않은 만큼 비승인 진료 행위라고 주장한다. 보험사가 실손보험금을 주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현행법에서는 원칙적으로 환자에게 진료비 청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임의 비급여를 법정 비급여로 눈속임해 환자들에게 보험금을 타내게 하는 사례가 빈번하고, 이는 보험금 누수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의료계에 실손보험 부실의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의료계는 임의 비급여 진료 행위를 제한할 경우 환자에게 필요하거나 환자가 원하는 최선의 진료를 받을 자유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모든 환자는 최선의 진료를 받아 생명을 유지할 자유권적 기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의료계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대법원은 2012년과 2018년 두 차례의 판결에서 임의 비급여 진료 행위를 예외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건강보험 틀 안에 급여를 청구할 수 있는 조정·절차가 마련돼 있음에도 치료의 시급성상 불가피한 상황 ▲의학적 필요성 ▲환자의 동의 등 요건을 갖춘 경우다. 다만 이 또한 입증이 쉽지 않아 임의 비급여와 관련한 의료계와 보험업계, 보건당국의 갈등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