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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역사상 첫 국부펀드 설립 추진 재무부, 12개월 내 신설 계획 재정적자 심화, 재원 조달 의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부펀드 설립을 지시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의 첫 국부펀드로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대로 추진되면 자산 2조 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현실적인 쟁점들을 둘러싼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통상 국부펀드가 대규모 외환보유액을 확보했거나 석유를 포함한 에너지 자원을 앞세워 부를 축적한 국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상황을 감안할 때 눈덩이 재정적자와 부채를 깔고 앉은 미국은 첫 단추부터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트럼프, 첫 국부펀드 설립 행정명령
4일(이하 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워싱턴DC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재무부와 상무부에 국부펀드를 만들라고 명령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열린 서명식에서 “미국이 국부펀드가 생길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우리는 이 기금을 통해 많은 부를 창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부펀드는 국가가 미래 세대를 위한 부를 쌓기 위해 투자용으로 별도 조성한 정부 자금이나 이를 운용하는 기관을 일컫는다. 주식, 채권, 부동산, 사모펀드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고 외환시장 개입이나 통화가치 안정화 등을 위해 활용한다. 국부펀드연구소(SWF Institute)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 90여 개, 약 12조7,000억 달러 규모의 국부펀드가 운용되고 있다. 미국이 연방정부 차원의 국부펀드 설립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선거운동 기간 정부 투자기금을 설립해 고속도로, 공항과 같은 인프라 프로젝트와 제조업, 의료 연구 같은 분야에 투자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바 있다. 미국 내에서도 민주당을 포함해 초당적으로 국부펀드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조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 안보 담당자들은 공급망과 에너지 인프라에 투자하는 데 초점을 맞춘 기금 조성 계획을 추진해 왔다. 민주당 소속 모건 맥가비 미 하원의원(켄터키주)도 지난해 미국 국부펀드 설립을 추진하는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글로벌 금융시장 '메기' 되나
AP통신은 국부펀드 설립으로 미국 국영 자원 수익금을 투자에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신설하는 국부펀드가 규모 면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사우디 국부펀드를 따라잡고 싶다"며 "미국은 짧은 시간에 가장 규모가 큰 국부펀드 중 하나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국부펀드를 통해 최첨단 제조 허브나 의료 연구, 방위 역량 증진 등에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에너지 부국인 사우디가 국부펀드를 운영하면서 각종 프로젝트에 출자하는 것을 눈여겨본 셈이다. 국부펀드연구소(SWFI)에 따르면 사우디 국부펀드인 공공투자펀드(PIF)의 자산 규모는 9,250억 달러(약 1,350조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 정부가 국부펀드를 활용해 틱톡을 인수할 수도 있다는 뜻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아마도 틱톡과 무엇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우리는 그것(틱톡)을 국부펀드에 넣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부유한 사람들과 협력할 수도 있다. 많은 선택지가 있다”고 했다. 그는 취임 첫날인 지난달 20일 의회가 지난해 통과시킨 ‘틱톡 금지법’ 시행을 75일간 유예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지분의 50%를 미국 측에 넘기는 방안을 제시했다. 미국 주요 매체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발언을 두고 국부펀드를 통해 틱톡 지분을 확보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의회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이 금융자산 확보보다 지정학적 자산에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파나마운하와 그린란드 매입 자금으로 국부펀드를 쓸 수 있다는 관측이다. 국부펀드 설립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공화당 소속의 테드 요호 전 플로리다주 연방 하원의원은 “(펀드를 이용한) 파나마운하나 그린란드 매입이 정신 나간 소리 같겠지만 트럼프가 둘 중 하나, 어쩌면 둘 다 해낸다면 이는 알래스카나 루이지애나 매입만큼이나 미국에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정치인 쌈짓돈 된다" 경고
다만 국부펀드를 신설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미국 정부는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겪고 있어 국부펀드 재원을 마련하기 어려운 상태다. 의회 전문매체 더힐은 미국의 현재 재정 상태를 고려할 때 미래에 생길 것으로 기대하는 흑자에 의존한 국부펀드 설립 제안은 비현실적이라고 전했다. 실제 미 재무부는 36조 달러(약 5경2,100조원)에 달하는 부채에 디폴트를 내지 않으려고 비전통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는 실정이다.
의회 관문도 넘어야 한다. 의회는 스스로의 입지를 좁힐 수 있는 국부펀드를 승인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 또한 글로벌개발센터(CGD)는 보고서를 내고 국부펀드의 실제 운영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펀드가 정치인들의 쌈짓돈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얘기다. 보고서는 아울러 "관세 수입을 펀드로 따로 배정하되 다른 지출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국부펀드가 까다로운 예산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틱톡 인수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번지고 있다. 앞서 그는 미국인 1억7,000만 명가량이 사용하는 틱톡 지분을 조인트벤처를 통해 미국이 50%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 CNN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계획대로 12개월 이내에 국부펀드가 출범한다 하더라도 틱톡이 새 주인을 찾아야 하는 시한을 이미 크게 넘기게 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연장한 틱톡의 매각 시한은 불과 75일로, 모기업인 바이트댄스는 4월 말까지 인수자를 찾거나 미국 시장에서 발을 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