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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국내 은행 NPL 매각 8.3조원
상호금융업권도 매각 행렬 동참 예정
대출 증가율 ‘주춤’, 연체 증가율 ‘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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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등 금융기관의 부실채권(고정이하여신)을 거래하는 NPL 시장이 날이 갈수록 그 규모를 키우고 있다. 건전성 제고가 시급한 금융기관들이 3개월 이상 연체된 채권을 대규모 매각하면서 이를 저가 매입하려는 투자사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진 양상이다. 특히 은행권에서는 지난 한 해에만 8조원어치가 넘는 연체 대출을 매각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가들은 NPL 시장 확대의 이면에 있는 경기 침체 장기화를 주목하는 모습이다.
채권액 전부 회수 불가능, 상각 또는 매각
20일 금융 컨설팅기관 삼일PwC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은행에선 총 8조3,100억원어치의 NPL 매각이 이뤄졌다. 이는 전년 동기(5조4,300억원) 대비 50% 이상 늘어난 수치이자, 역대 최대 규모다. 이 가운데 약 77%에 해당하는 6조4,100억원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IBK기업은행 등 6대 은행에서 매각됐다.
통상 은행 등 금융기관은 3개월 이상 원리금을 회수하지 못한 대출 채권을 ‘고정이하’ 등급의 부실채권으로 분류해 별도 관리한다. 이후 회수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아예 장부에서 지워버리거나(상각·write-off), 자산유동화 전문회사 등에 헐값에 넘기는(매각) 방식으로 처리한다. 채권액의 일부라도 회수해 재무 건전성을 개선하려는 의도에서다. 특히 지난해에는 금융당국이 은행의 건전성 제고에 고삐를 죄면서 부실채권 거래가에 대한 눈높이 또한 낮아졌다는 게 은행권의 중론이다.
이는 NPL을 인수하는 전문기업들에는 저가 매입의 기회로 작용했다. NPL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자산운용사들이 앞다퉈 현금 확보에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에 의하면 국내 NPL 전업투자사 5곳인 연합자산관리(유암코), 하나에프앤아이, 대신에프앤아이, 키움에프앤아이, 우리금융에프앤아이가 지난해 채권 발행 등으로 마련한 자금은 약 2조8,600억원으로 전년 동기(1조 6,700억원) 대비 72%가량 증가했다.
유암코는 1조2,000억원으로 가장 큰 모집금액을 기록했으며, 이어 △하나에프앤아이 6,970억원 △대신에프앤아이 4,340억원 △키움에프앤아이 2,620억원 △우리금융에프앤아이 2,700억원 등이 뒤를 이었다. NPL 투자사들의 일반적인 레버리지 비율이 자본금의 4배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자산운용사가 지난해 마련한 자금을 기반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은 최대 11조4,4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상업용 부동산 PF 부실→NPL 증가세 가속
삼일PwC는 올해 상반기 NPL 시장 규모가 5조원대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전년 동기(4조원) 대비 25% 증가한 수준이다. 삼일PwC는 “부동산 관련 NPL이 주요 투자 대상으로 떠오른 가운데 상호금융업권에서도 매각에 나서면서 시장 성장을 가속할 것”이라면서 “장기화한 경기 침체와 대외 불확실성 또한 NPL 매물 급증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은행권에서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관련 부실 증가가 연체율 상승과 NPL 시장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진단을 내놨다. 금융당국이 부동산 PF 연착륙 방안을 추진함에 따라 사업성 평가 과정에서 NPL로 분류되는 자산이 증가할 것이란 관측에서다. 금융감독원에 의하면 국내 은행의 원화 대출 연체율은 2021년 말 0.21%로 내려갔다가 점차 상승해 지난해 11월 말 0.52%를 기록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11월(0.48%)을 소폭 웃도는 수준이다.
상가와 오피스텔 등 상업용 부동산의 NPL 증가세는 더욱 두드러진 것으로 파악됐다. 하나은행을 예로 들면, 지난해 1분기 기준 담보 유형별 부실채권 매각의 45.1%를 상업용 부동산이 차지했다. 아파트, 주택 등 주거용 부동산(24.3%)이나 공장 등 공업용 부동산(29%)과 비교해 한참 웃도는 수준이다. 경기 침체 영향으로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늘어난 동시에 수도권 신도시 상가 공급이 증가한 데 따른 결과다.
이와 관련해 이영준 하나은행 여신관리본부장은 “부실채권 물량은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고금리와 부동산 경기 침체로 투자자들은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면서 “투자자가 시장을 주도하면서 채권 가격은 떨어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어 “작년 상반기만 해도 채권가격(대출원리금)의 90% 안팎에서 거래됐는데, 최근에는 80% 정도로 내려왔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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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당국 ‘대출 조이기’에도 연체율 꾸준히 상승
전문가들은 NPL 시장 확대로 대변되는 경기 불황이 쉽사리 개선되기 힘들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환율 상승, 글로벌 경기 불안, 내수 회복 지연 등 각종 부정적 요소가 겹치면서 당분간 연체율이 우상향을 유지할 것이라는 평가다. 김도하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은행의 부실채권 대규모 상·매각에도 연체율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면서 “연체 증가율이 대출 증가율을 상회하는 현상은 올해 상반기 내내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했다.
기업대출 부실채권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암울한 전망에 힘을 보탠다. 기업은행의 지난해 말 기준 고정이하여신 규모는 4조1,970억원으로 전년(3조1,910억원)과 비교해 1조원 이상 늘어났다. 이 같은 연체율 증가세는 중소기업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기업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연체액은 2023년 1조4,863억원에서 지난해 말 2조539억원으로 38.2% 증가했다. 연체율도 0.64%에서 0.83%로 뛰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조기경보 및 신용위험 특별점검 등을 통해서 선제적으로 건전성을 관리해 적시 대응 방안을 마련하고 있고, 충당금 잔액을 고려할 때 손실흡수능력은 충분한 수준”이라면서도 “다만 최근 환율 변동성이 워낙 심했던 만큼 대외적으로 건전성에 취약하게 노출되는 업체가 있을 것이란 판단에 심층 점검을 추진 중이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