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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회원국에 방위비 'GDP 5%' 상향 압박 "美도 5% 기준 적용해 방위비 증액할 계획" 단기간엔 어려워도 현실적 실행계획 필요해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의 방위비 지출 목표를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회원국들에 실질적인 이행 계획 마련을 촉구했다. 미국이 나토 내 안보 부담을 유럽에 전가하려는 기조를 본격화하자,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들 사이에서는 독자적 방위 체계를 구축하려는 '자강론'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나토 조약에 따른 집단 방위의 원칙이 흔들리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동맹국을 향해서도 안보와 통상을 연계해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美 "집단 방위 조약 이행하지 않는 나토 반대"
3일(현지시각) 나토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한 루비오 장관은 "나토 회원국의 방위비를 GDP의 5%까지 확대해야 한다"며 "모든 회원국이 이러한 필요성에 공감하고, 국방비 증액을 위한 현실적인 계획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뒤 브뤼셀을 떠나고 싶다"고 밝혔다. 현행 나토 방위비 지출 목표는 'GDP의 최소 2%'로 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나토 회원국이 안보를 미국에 떠맡기고 있다'며 방위비 증액을 압박해 왔다.
루비오 장관은 이어 "미국 역시 방위비 증액 대상으로 방위비 지출 비율을 늘릴 것"이라며 "미국이 생각하는 만큼 회원국들이 군사적 위협의 심각성에 인식을 같이한다면 이에 대한 대응 역량을 갖추겠다는 완전하고 실질적 약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의 방위비 지출 목표 상향을 주장한 이후, 미국 고위 당국자가 자국의 방위비 방침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미국의 방위비 지출은 GDP의 3.38%로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5%에 미치지 못한다.
루비오 장관은 또 "트럼프 대통령은 나토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모든 회원국이 나토 조약에 따라 주어진 의무를 다하지 않고 이를 이행하기 위한 역량조차 갖추지 않는 나토를 문제 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집단 방위의 원칙을 규정한 나토 조약 5조의 내용으로 언급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면서 그는 "이 같은 입장은 트럼프 대통령 집권 1기에도 마찬가지였다"며 "모든 회원국이 1~2년 내 목표를 달성할 거라 기대하진 않으나,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방위비 증액 경로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럽 주요국, '자강론' 속에 국방비 지출 확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이어지는 미국의 방위비 압박에 유럽 주요국들은 향후 유럽이 미국의 책임을 대신할 수 있도록 독자적 안보·방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복수의 관계자를 인용해 "미국이 나토에서 부담해 온 재정적·군사적 역할을 향후 5∼10년 안에 유럽으로 이전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며 "영국, 프랑스, 독일을 비롯해 북유럽 국가들이 비공식적이지만, 체계적인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은 오는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나토 정상회의 전에 미국에 제시할 예정이다.
보도에 따르면 유럽 주요국이 논의 중인 이번 구상은 미국의 나토 철수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차원으로, 국방비 증액과 군사력 강화에 대한 유럽의 확고한 공약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를 중단하면서, 유럽 내에서는 미국의 전략적 이탈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공개된 트럼프 행정부의 '임시 국가방위전략 지침'에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최우선 대응 과제로 상정하고, 러시아·북한·이란 등의 위협에 대해선 유럽·동아시아·중동의 동맹국에 맡긴다는 내용이 담겼다.
나토 내부에서도 미국의 역할이 줄거나 거의 없는 상태로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아예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최근에는 영국과 프랑스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위해 군 파견을 논의하는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이 미국을 제외하고 논의를 진행 중이다. 유럽이 미국의 참여 없이 독자적인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려는 시도가 이미 구체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현재 이 연합을 주도하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해 스웨덴, 덴마크,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31개국이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국가 차원의 방위비 증액도 속도를 내고 있다. 독일은 지난달 19일 향후 10년간 최소 5,000억 유로(약 800조원)를 국방에 투자하는 법 개정을 확정했다. 영국은 매년 134억 파운드(약 25조원), 프랑스는 2030년까지 총 4,000억 유로의 방위비를 추가 투입하기로 했고, 덴마크·네덜란드·스웨덴·폴란드 등도 대규모 군비 확장 계획을 발표했다. 유럽연합(EU)은 27개 회원국의 방위력 강화를 위해 8,000억 유로(약 1,260조원) 규모의 '유럽 재무장 계획'을 내놨다. 이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면 EU 내 23개 나토 회원국의 국방비가 GDP 대비 3.5% 수준으로 늘어난다.
방위비·관세 무기로 韓·日 등 동맹국 압박
트럼프 행정부의 방위비 증액 압박은 나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일본 등 오랜 기간 안보 동맹을 유지해 온 동아시아 국가 역시 예외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을 유지하는 대가로 방위비 부담은 물론 경제적 기여까지 요구하며 관세 압박을 병행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달 6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일 안보조약을 언급하며 "일본은 엄청난 경제적 이득(fortune)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을 비롯한 동맹국들이 안보에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관세와 함께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본격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을 이어갔다. 그는 "한국의 평균 관세율이 미국보다 4배 높다”며 “한국에 군사적으로나 다양한 방식으로 엄청난 지원을 제공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일 안보조약은 유사시 자동 개입 의무가 명시된 한·미 상호방위조약과는 달리, 미국이 일본을 방어할 의무는 있지만, 일본은 주일미군에 대한 기지 제공만 규정하고 있다. 반면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한 국가가 무력 공격을 받을 경우 공동 대응을 위한 협의를 명시하고 있어, 미국의 군사 개입 가능성이 더 강하게 내포돼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당시 한국을 '머니머신'에 비유하며 "부자 나라를 왜 지켜줘야 하느냐"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같은 발언은 나토나 일본처럼 한국에 대해서도 경제·안보 연계 전략이 본격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무기로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재협상, 중국 견제를 위한 군사·외교적 역할 확대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또 지난달 미 의회 연설에서 언급한 알래스카 자원 개발 사업처럼, 안보 지원을 명분으로 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한국의 경제적 참여를 압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