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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국 유럽향 수출 8% 증가
EU 내부 친미·중립 노선 혼재
경제·외교 다극화에 유럽 몸값↑

미국과의 갈등 심화 속 중국이 수출 전략의 축을 유럽으로 옮기는 모습이다. 지난달 중국의 대미 수출이 급감한 반면 유럽·동남아 수출은 증가세를 보였고, 특히 유럽연합(EU) 국가에 대한 하이테크 수출은 가파르게 치솟으며 공급망 재편의 신호탄이 되고 있다. 중국은 유럽 기업에 희토류 수출 허가를 신속히 부여하는 등 전략적 유화 조치에 나섰지만, 유럽 내부의 복잡한 대중 견제 기류와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 관계가 변수로 작용하는 양상이다.
中 수출 중심 성장전략 ‘우회로’ EU
27일 중국 해관총서에 따르면 지난 5월 중국의 총수출액은 3,161억 달러(약 428조원)로 전년 동월 대비 4.8% 증가했다. 수입액은 같은 기간 3.4% 감소한 2,128억8,000만 달러(약 288조원)로 집계됐으며, 이로써 무역수지는 1,032억2,000만 달러(약 140조원) 흑자를 기록했다. 지역별로는 미국으로의 수출이 21% 감소한 반면, 아세안 10개국으로의 수출과 EU로의 수출은 각각 21%와 8% 증가했다. 대미 수출이 급감했지만, 다른 지역의 수출이 증가하며 하락분을 상쇄한 형국이다.
하이테크 분야로 범위를 좁히면, 이 같은 대체 시장의 존재감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27개 EU 회원국에는 막대한 양의 중국산 하이테크 제품이 유입되며 일부 국가의 수입 수치가 전례 없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지난달 중국의 대에스토니아 하이테크 수출은 1년 전보다 79.4% 급증했고, 키프로스는 70.5%, 불가리아는 46.7%, 헝가리는 42% 늘었다. 더 큰 EU 시장에서도 중국은 프랑스에 24.2%, 독일에 21.72%, 스웨덴에 20.4% 전년 대비 많은 양의 하이테크 제품을 수출했다.
이 같은 흐름 중국이 수출 중심 성장 전략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내수 확대를 통한 순환경제 강화 시도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글로벌 공급망 내 입지를 유지하기 위한 대안으로 유럽을 주목한 것이다. 미국과의 통상 전선이 차단된 상황에서 전략적 중립을 견지하거나 실리를 중시하는 유럽 국가들과의 연결 고리를 강화해 탈미 전략을 강화하는 식이다. 특히 희토류·전기차·신재생에너지 등 전략 산업 중심의 연계가 본격화될 조짐도 감지된다.
실제로 중국은 유럽 기업에 대한 희토류 수출 허가를 신속히 추진하며 전략물자 통제의 물꼬를 스스로 푸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희토류는 반도체·전기차·방산 등 유럽의 핵심 산업에 필수적인 소재로, 중국이 수출 허가 속도를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품목이다. 이 같은 조치는 단순한 통상 문제를 넘어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흐름에서 유럽을 이탈시키려는 외교 전략의 일환이다. ‘희토류 카드를 푸는 대신 유럽의 규제 강도를 낮춰달라’는 식의 상호주의적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보다 직접적인 외교적 메시지도 내놨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26일 베이징 주재 폴란드 대사관에서 EU 외교 특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과 EU는 혼란으로 가득 찬 세계에 절실히 필요한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할 책임과 능력을 갖고 있다”며 “양측은 상호 신뢰를 강화하고, 이견을 적절히 관리하고, 강점을 공유하고,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접근 시도, 분열 틈새 노림수에 가까워
이처럼 중국이 유럽을 새로운 외교·통상 파트너로 설정하며 관계 강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EU가 이를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구조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우선 EU는 단일 국가가 아니라 27개 회원국의 연합체로, 각국의 대외정책과 이해관계가 천차만별이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주요국은 대중 무역에서 일정 수준의 실리를 추구하지만, 동유럽이나 북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안보 리스크와 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뚜렷하다. 이는 곧 EU가 일관된 대중 전략을 세우기 어려운 배경이 된다.
무엇보다 최근 몇 년간 유럽은 중국에 대한 통상 규제를 점차 강화하는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4월 EU 집행위원회는 중국산 고소작업장비(MAE)에 대해 최고 66.7% 상계 관세를 부과하며 시장 왜곡에 대한 대응임을 분명히 했다. 이보다 앞선 1월에는 반도체·인공지능·양자기술 등 전략 기술 분야의 국외 투자에 대해 15개월간 위험 평가를 권고하기도 했다. 이는 ‘기술 안보’라는 명분 아래 중국 등의 외국 자본이 EU 핵심 기술 시장에 지나치게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전 차단하고 통제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여기에 지정학적 변수도 작지 않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확대와 미군 주둔 유지 등 미국과의 안보 협력 강화에 공을 들여 왔다. 유럽 각국은 러시아를 억제하기 위한 실질적 수단이 부족한 만큼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는 대외 전략은 근본적으로 선택하기 어렵다는 게 외교계의 중론이다. 다만 미국이 유럽을 상대로 방위비 분담 확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적용 예외 등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는 만큼 갈등의 싹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평가다.
유럽은 미국·중국 모두와 관계 재조정 시도
이런 가운데 유럽은 미국과의 전략적 거리를 조정하며 외교·안보 구도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최근 유럽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외교 지평을 넓히기 위해 제3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달 유럽 15개국은 EU에 공식 서한을 보내 “러시아를 압박하려면 제3국 외교를 강화해야 한다”고 요청했고, EU 차원에서도 다극적인 외교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는 곧 미국 일변도의 외교 노선을 탈피하려는 움직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의 연대도 빠르게 강화되는 추세다. 일본은 최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4대 강국과 방위 협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공동 군사훈련과 방산 기술 이전, 사이버 안보 협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고 있다. 이는 단순한 양자협력을 넘어 인도·태평양과 유럽 대륙을 아우르는 공동 방위구조 모색으로 풀이된다. 유럽과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면서도 미국의 일방적 구도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 노선을 구축하려는 공통된 전략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국제사회의 주된 시각이다.
이처럼 유럽은 한편으로 미국의 안보 우산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경제·외교의 다극화를 꾀하며 국제 무대에서 몸값을 키우고 있다. 이는 곧 유럽이 기존의 보조적 위치를 벗어나 주체적 외교 행위자로 부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재편, 전략물자 확보 등 초국가적 과제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유럽의 입지는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극 구조 사이에서 유럽이 협상의 중재자이자, 규범 설정자 역할까지 노리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