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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한·일·대만에 알래스카 LNG 카드 제시 중국 해상 패권 흔들 수 있는 ‘에너지 포석’ 중동·러시아의 에너지 지배력 약화도

미국과 한국 간 관세 협상에서 한국의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참여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있어 관세가 단순한 통상정책이 아닌 지정학적 무기로 활용되는 것처럼, LNG 역시 단순히 무역적자 해소를 위한 에너지 품목만은 아니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는 관세 협상이나 수출입 이익의 차원을 넘어선 전략적 에너지 외교의 일환으로 △중국의 해양 봉쇄 전략 무력화 △동맹국의 에너지 안보 보강 △북극항로를 통한 수출 다변화 △중동 및 러시아 견제라는 전략적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지정학적 '승수효과'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트럼프 행정부, 알래스카 LNG 우선 구매 압박
8일(현지시간)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이 한국과 일본, 대만과의 관세 협상에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베선트 장관은 이날 CNBC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아마도 한국, 아마도 대만이 제공할 수 있는 알래스카의 대규모 에너지 거래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면서 "한국과 일본, 대만이 많은 가스관과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것은 미국에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기에 그들이 먼저 제안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테이블 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는 알래스카 최북단 프루드호베이에서 태평양과 접한 니키스키까지 가스관을 통해 천연가스를 운송하는 사업이다. 이를 위해 약 1,300㎞에 이르는 가스관을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지역에서 대규모 석유·천연가스 유전이 발견된 것은 60년 전으로, 이후 미국은 여러 차례 사업 추진을 검토했으나 경제성 문제로 성사되지 못했다. 초기 건설 비용만 440억 달러(약 65조원)가 필요한 초대형 사업이라는 점이 주요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오하이오에서 텍사스까지 셰일가스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굳이 알래스카를 개발할 필요가 없어져 한동안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한국과 일본이 이 프로젝트에 수조 달러를 투자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재조명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을 지목한 것은 두 나라가 LNG 수입 시장의 큰손이라서다. 2023년 기준 LNG 수입 시장에서 일본(16.5%)과 한국(11.3%)은 약 30%에 육박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인구 대국 중국(17.6%)보다 많은 수준이다.
에너지를 100%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현재 카타르나 오만 등 중동 국가에서 LNG를 수입하고 있다. 이는 중동에서 LNG를 수입하면 20일 정도 걸리는 반면 미국에서는 통상 30일 정도가 소요되고, 규모가 큰 LNG 운반선은 50일까지도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래스카를 통한 직수입이 가능해지면 이런 운송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 현재 미국 남부에서 출발한 LNG선이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약 30일이 소요되는 반면, 알래스카에서 출발할 경우 불과 7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 이는 운송 비용 절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중동의 경우 LNG 가격 변동성이 큰 만큼, 미국산으로 바꾸면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의 통상 압력을 완화할 수 있는 카드로도 활용할 수 있다.

대만해협 군사적 긴장 속, 韓 에너지 안보 강화 기대
중국-대만해협에서의 군사적 긴장 상황에서도 에너지 수급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안보적 이점도 있다. 북미 지역에서 직접 가스를 공급받음으로써 에너지 안보를 강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2022년 8월 중국은 낸시 펠로시 미국 당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반발해 '대만 포위' 군사 훈련을 단행한 바 있다. 중국의 대만 봉쇄엔 대만 오른쪽에 있는 바시해협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나라 원유 수입량의 90%는 호르무즈-말라카-바시해협을 잇는 남방항로를 통해 수입된다. 바시해협이 봉쇄된다는 것은 우리 해상교통로의 숨통이 끊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 정부는 대만과의 통일을 외교적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을 포함한 전반적인 해상패권 확보 전략이 내재돼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의 실질적 의도는 대만해협을 군사적으로 통제함으로써 한국, 일본 등이 중동에서 수입하는 석유·천연가스의 해상 운송로를 봉쇄하고, 동시에 반도체 및 첨단 제조업 제품이 유럽으로 향하는 수출 경로를 차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략이 실현될 경우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주요 경제국뿐 아니라 경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아세안 국가들까지 중국의 해양 지배 구조 내에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미국 입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진주만 공습 이전, 일본이 서태평양 전역을 장악하던 상황과 유사한 해양패권 위협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글로벌 에너지 시장 재편 가능성
이런 맥락에서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는 단순한 에너지 개발 사업을 넘어 전략적 무기 수준의 가치로 평가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생산된 LNG는 한국과 일본, 나아가 대만까지 공급될 수 있는 만큼 중동 지역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근본적으로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중동 산유국들이 지배하고 있는 에너지 시장에서 미국산 LNG는 보다 유연한 가격 체계와 공급 안정성을 바탕으로 ‘탈중동 에너지 수급 구조’를 구축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평가받는다. 알래스카 LNG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대체 수단으로 자리잡을 경우 OPEC+ 체제를 중심으로 세계 원유·가스 가격을 조절해 온 중동 국가들의 협상력은 현저히 저하될 수밖에 없다.
특히 알래스카-베링해협-그린란드-영국을 잇는 북극항로까지 본격적으로 활용되면 LNG 수송 루트는 유럽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동아시아의 에너지 안보를 넘어 우리나라의 유럽 수출 물류라인 다변화를 가능하게 하며, 중국이 대만해협을 군사적으로 장악하더라도 그 전략적 효용성을 반감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중국이 의도하는 해상 봉쇄 전략의 실효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알래스카 LNG는 러시아 등 비(非) OPEC 산유국 간 협의체인 OPEC+ 체제 및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를 제어하는 효과도 지닌다. 현재 러시아의 경우 에너지 수출이 국가 재정의 절대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데, 알래스카 LNG가 유럽과 동아시아로 안정적으로 공급될 경우, 이는 러시아의 가스 시장 점유율을 직접적으로 잠식하는 효과를 낳으며 에너지 무기화 역시 무력화할 것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