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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무의미한 소모전 끝내야” 30시간 그친 4월 협상 실패 연장선 미·러 접점 부재, 러시아 노골적 반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조건 없는 30일 전면 휴전을 제안하면서 교착 상태의 전쟁에 다시금 정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공식 제안자는 미국이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와의 통화에서 먼저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러시아가 미국 중심 질서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데다, 푸틴 체제의 균열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대두되면서 실제 이행까지는 상당한 난관이 예상된다.
가시적 성과 필요한 트럼프
8일(이하 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미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이상적으로 30일간의 조건 없는 휴전을 요구한다”며 “수용할 수 있는 휴전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만약 휴전하지 않을 경우,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은 더 많은 제재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나라의 전쟁이 무의미한 소모전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매주 수천 명에 달하는 젊은 군인들이 죽어가고 있다”며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유럽인들과 함께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휴전은 궁극적으로 평화 협상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는 양국의 협조에 따라 매우 빠르게 이뤄질 수 있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논조다.
공식적으로는 미국 측에서 먼저 평화 시도를 언급한 셈이지만, 실제로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트럼프와의 통화에서 먼저 휴전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전쟁 장기화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병력, 물자, 재정 전반에 걸쳐 한계 상황에 다다른 상태고, 미국의 무기 지원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반격이 어려운 국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 직후 나왔다.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30일간의 휴전을 시작할 준비가 됐다”며 “세계는 미국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전쟁 국면에서 미국의 직접 개입 또는 조정 역할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모양새를 취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다만 이번 제안이 실질적인 협상 국면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앞서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을 맞아 8일부터 10일까지 72시간의 일시적 휴전을 선언했으나, 우크라이나는 이를 “기만적인 제스처”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며 러시아가 휴전 선언 이후로도 700건 이상의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조건 없는 정전’에 응할 유인이 부족하다는 게 국제사회의 주된 견해다.
4월 부활절 휴전은 성사 불발
30일 조건 없는 휴전 제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지난 4월 초에도 부활절을 계기로 양측에 휴전 제안이 있었다. 당시에도 미국과 유럽 외교진은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전면 정전을 권고했으나, 러시아는 단 30시간짜리 일방적 휴전을 선언하는 데 그쳤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크렘린궁에서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과 면담 중 “러시아는 (모스크바 현지시간으로) 오늘 18시부터 21일 0시까지 부활절 휴전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푸틴 대통령의 휴전 명령은 트럼프 미 행정부의 경고 직후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두 전쟁 당사국(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중 한쪽이 상황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면, 우리는 더 이상의 중재 노력을 사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우리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를 희망한다”며 “우리는 (전쟁의) 끝을 보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도 같은 날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 국가들과 회동한 뒤 “평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경우 미국이 중재 역할에서 손을 뗄 수 있다”며 러시아·러시아를 동시 압박했으며, 태미 브루스 국무부 대변인은 “이제 문명 세계는 러시아가 정말로 진지한지 지켜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의 30시간 휴전 발표에 회의적 반응을 내놓으면서 휴전 연장을 역제안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발표한 휴전 개시 직후인 지난달 19일 오후 자신의 SNS를 통해 “완전한 휴전이 유지된다면, 우크라이나는 휴전을 부활절인 20일 이후로 연장할 것을 제안한다”며 “진정한 신뢰 구축 조치를 위해 30시간은 부족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중재안을 이행할 것을 거듭 촉구한 것이다.
이어 젤렌스키 대통령은 실제 전투 지역에서 휴전 합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는 “현재 총사령관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의 공격 작전은 일부 전선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러시아가 이제 와서 갑자기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휴전에 진정으로 관여할 준비가 돼 있다고 한다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행동에 따라 그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군사·외교적 ‘손해 보는 그림’ 우려
러시아는 미국이 제시하는 해법에 불만이 있다는 입장이다.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은 이달 1일 자국 관영 매체 인터내셔널어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휴전 방안에는 오늘날 러시아의 주요 요구 사항인 ‘분쟁의 근본 원인’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려는 내용이 전혀 없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전쟁을 끝내라는 명확한 신호를 보내는 것 역시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서방 패권에 대한 저항’으로 규정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어떠한 휴전안도 원칙적으로 거부해 왔다.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포기 △러시아 점령지에서의 우크라이나군 철수 등을 요구하며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조건 없는’ 휴전안에 동의하는 것은 외교적 패배처럼 보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더불어 지금 시점에서의 정전은 러시아에 불리하게 작용할 공산이 크다. 러시아군은 대다수 점령지를 유지 중이며, 동부 전선에서는 제한적이나마 전진을 이루기도 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예산 지연과 무기 부족, 병력 피로 누적으로 반격 여력이 저하된 상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전을 수용하는 것은 러시아가 전략적으로 유리한 타이밍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평가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러시아 내부 여론과 정치적 균형이다. 현재 푸틴 대통령은 전쟁 장기화를 내부 단속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체제의 안정장치이자 통치 동력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휴전이 현실화할 경우, 정권 전반에 숨겨져 있던 균열이 드러날 수 있다. 결국 러시아 입장에선 ‘조건 없는 정전’이 단지 전술적 판단을 넘어 외교·정치·권력구조 전반에 부담을 주는 복합적 변수로 작용하는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