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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만한 자산’의 달라진 정의
탈 달러 구도 새 판 짜는 중국
금 보유 비중 확대 움직임 활발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흔들리는 모습이다. 미국의 정치 불안정과 금리 리스크가 맞물리면서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은 외환 보유 전략을 전면 수정 중이다. 위안화와 유로화의 비중이 점차 확대되는 가운데, 금 보유량을 늘리려는 구상 또한 점점 명확해지는 추세다. 최근에는 신흥국들마저 달러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며 글로벌 통화 질서의 다극화를 앞당기고 있다.
美 정치 불안정+금리 변동성→달러 신뢰도 하락
24일(이하 현지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글로벌 중앙은행 세 곳 중 한 곳은 향후 1~2년 이내 금 보유 비중을 늘릴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로이터는 “공적통화 금융기구 포럼(OMFIF)이 약 5조 달러(약 6,813조원) 규모의 외환보유고를 관리하는 75개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금 보유를 확대하겠다고 응답한 중앙은행이 줄이겠다고 응답한 중앙은행 수를 대폭 상회했다”고 설명했다.
통화 가운데선 유로화가 보유를 확대할 통화 1위로 집계됐다. 전 세계 중앙은행 가운데 16%가 향후 2년간 유로화 보유량을 늘리겠다고 답했다. 이어 중국 위안화가 2위를 차지했으며, 3위 일본 엔화, 4위 호주 달러, 5위 캐나다 달러, 6위 영국 파운드화 등 순을 보였다. 지난해 진행된 같은 조사에서 보유 확대 예정 통화 1위를 기록했던 미국 달러화는 올해 7위까지 밀려났다.
조사에 응한 각국 중앙은행 관계자들은 달러 투자 회피의 가장 큰 원인으로 미국의 불안정한 정치 환경을 꼽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 세계를 상대로 한 관세 부과 압박과 그에 따른 혼란,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독립성 훼손 시도가 안전 자산으로 분류돼 온 달러에 대한 신뢰도를 크게 저해한다는 지적이다.
OMFIF는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0년 후인 2035년에는 달러가 세계 외환 보유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52%가량을 나타낼 것으로 예상했다. 1위 준비 통화하라는 데는 변함이 없지만, 현재 비중인 58%보다 크게 낮아질 것이란 관측이다. 반면 유로화는 10년 후 세계 외환 보유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22%에 달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IMF 수석 경제학자를 지낸 케네스 로고프는 “유로화의 부상은 유럽 경제에 대한 기대보다는 달러의 지위 약화 때문”이라며 “현시점에서 유로는 외환 보유고에 상당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유일한 대체 통화”라고 말했다. 중국 위안화는 여전히 당국의 자본 통제를 받는 통화인 만큼 유연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달러 빠진 자리 일부 위안화가 차지
그러나 시장은 전문가들의 관측보다 위안화에 훨씬 우호적인 분위기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자본 통제나 국제적 유연성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최근 글로벌 외환 보유 다변화 흐름에서 위안화가 일정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달러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신흥국들을 중심으로 위안화 결제 비중이 상승하는 추세다. 외환 보유고 구조의 문제를 넘어 무역·투자 계약의 결제 통화 선택지에서도 위안화의 존재감이 점차 확대되는 상황이다.
지난 5월 4일에는 아세안(ASEAN)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등 이른바 ‘10+3’ 국가들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회의에서 새로운 신속 금융 메커니즘을 공식 승인하기도 했다. 해당 메커니즘은 처음으로 위안화를 포함한 지역 통화 기반으로 운용된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글로벌 관세 정책이 야기한 금융 불안정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아시아 통화의 강세와 미국 국채 시장의 급격한 변동성이 이러한 메커니즘 도입을 앞당겼다는 분석이다.
중국 정부 차원의 위안화 국제화 전략도 꾸준히 추진 중이다.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 디지털 위안화 발행 시범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달러 중심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을 구축해 왔다. 여기에 최근에는 브릭스(BRICS)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공동 결제망이나 역내 통화 결제 확대 구상을 활발히 논의 중이다. 이는 단순히 중국 주도의 이익 추구를 넘어 미국 리스크에 피로감을 느낀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변화로 읽힌다.
위안화의 영향력 확대는 실제 수치로도 드러난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의하면 지난 4월 기준 글로벌 결제 시장에서 위안화 비중은 5.2%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는 엔화와 파운드화를 넘어선 수준이며, 비유럽권 통화 중에선 사실상 유일하게 상승세를 유지한 결과다. SWIFT는 “러시아,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자원국들과의 거래에서 위안화 사용 비중이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현금보다 실물’ 선호, 불확실성 시대의 안전자산 귀환
각국 중앙은행의 달러 보유 비중이 축소되면서 떠오른 또 하나의 대안은 금이다. 금은 현금이나 채권처럼 지급 보증인의 부도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며, 실물자산으로서의 내구성과 환금성에서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다. 최근 수년간의 변동성 장세와 지정학적 불확실성은 “현금보다 실물”이라는 공식을 부활시켰고, 각국 중앙은행들은 포트폴리오 다변화의 수단으로 금 보유를 적극 확대하고 있다.
세계금협회(WGC)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세계 73개 중앙은행 가운데 95%가 향후 12개월 동안 세계 중앙은행들의 금 보유량이 늘 것으로 내다본다고 답했다. 설문에 응한 중앙은행의 43%는 자국의 금 보유량도 같은 기간에 늘 것이라고 답했다. 이는 2024년 29%에서 크게 오른 수치로, WGC가 해당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WGC는 “신흥국을 중심으로 금 비중 확대가 두드러졌는데, 달러 의존도를 줄이는 동시에 내부 보유 자산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고 풀이했다. WGC가 언급한 국가들은 러시아, 인도,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등으로 이미 수년 전부터 금 보유량을 공격적으로 늘려온 곳들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미국 금융 시스템의 영향력을 견제하거나 제재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띤다.
이처럼 금 보유 확대는 안전판 역할을 넘어 각국의 통화정책 독립성과 금융안정성의 수단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미국의 금리 정책이나 정치 리스크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자산을 늘려야 한다는 압력이 중앙은행 내부에서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금리와 무관한 자산인 금은 어느 통화권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외환보유 전략이 불확실성 회피로 기울수록 더 선호되는 특징을 갖는다. 달러의 약세가 한동안 지속될 것이란 전망 또한 이 같은 기류에 불을 지피는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