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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처럼 공적연금 추진 신설 공단이 기금 운용 전담 노후 소득 보장, 임금 체불 방지

고용노동부가 적립금 430조원에 달하는 퇴직연금을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公的)연금 성격으로 바꾸기 위해 5단계에 걸쳐 모든 사업장에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의무화 작업이 끝나면 퇴직급여는 퇴직금(일시금)이 아닌 연금으로만 받을 수 있게 된다. 퇴직금을 한꺼번에 소진할 위험과 임금 체불을 막아 안정적인 노후 소득을 보장하겠다는 취지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퇴직연금 수급자와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퇴직연금 의무화 방안, 대기업부터 5단계 나눠 추진
25일 노동계와 정치권 등에 따르면 고용부는 최근 국정기획위원회에 퇴직연금 개선 방안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법상 피고용자들은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거나, 그 돈을 연금형태로 나눠 받을 수도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데 고용부는 퇴직급여를 퇴직연금으로 단일화할 계획이다. 기업 규모별로 △300인 이상 △100∼299인 △30∼99인 △5∼29인 △5인 미만 등 대기업부터 5단계로 나눠 시행하는 방안이 우세하다. 또 정부는 현재 1년 이상 일해야 받을 수 있는 퇴직급여를 3개월만 근무해도 받을 수 있도록 논의 중이다. 해당 논의가 현실화할 경우, 사업주는 3개월 근무한 ‘단기 아르바이트생’ 등 거의 모든 근로자에게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
고용부는 중도 인출을 막기 위한 세제 지원 방안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퇴직연금을 의무화한다 해도 연금 개시 연령이 되기 전에 중간에 인출하는 사람이 많으면 제도 도입 의미가 퇴색된다. 퇴직연금은 중도에 인출하는 사유가 법으로 규정돼 있는데, 지금도 주택 자금 등으로 중도에 인출하는 사람이 많다.
고용부는 이를 막기 위해 20년 넘게 장기 가입 후 연금을 수령한 경우 세제 지원하는 방안을 국정기획위에 보고했다. 이와 함께 청년층에게 별도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안도 검토하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개인이 일한 대가로 받은 임금이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에 따른 중도 인출을 완전히 막을 순 없다”면서 “세제 혜택을 통해 장기 가입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시적 경영난에 퇴직금 체불 한해에만 7,000억
퇴직급여는 주당 15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가 1년 이상 일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급여다. 지급금액은 계속근로기간 1년에 대한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이다. 현행 법상 퇴직급여는 퇴직금과 퇴직연금제도로 나뉜다. 퇴직금은 회사가 자체적으로 적립했다 근로자 퇴사 시 지급하는데, 이 때문에 체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퇴직연금은 회사가 은행이나 증권사 등 사외 운용기관에 맡기는 구조기 때문에 체불 우려가 적다. 고용부가 윤석열 정부 때부터 퇴직연금 의무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이유다.
실제로 한국노동연구원의 노동리뷰 2025년 4월호에 실린 '퇴직급여 체불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고용부에 신고된 퇴직급여 체불 총액은 전체 체불액(1조7,845억원)의 40%에 달하는 7,289억원이었다. 이 중 퇴직금 체불액은 6,838억원, 퇴직연금 체불액은 452억원이다. 퇴직금 체불만 전체의 38%에 달한다.
퇴직금 체불의 76% 이상은 상시근로자가 30인 미만인 소규모 기업에서 발생했다. 퇴직금 체불 신고건수 비율은 5인 미만 사업장 32.4%, 5~29인 사업장 44.1%였다. 30~99인 사업장에서 발생한 퇴직금 체불도 15.8%에 달했다. 반면 퇴직연금의 경우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 체불이 44.3%, 30~99인 사업장은 30.0%로 나타났다.
전체 퇴직급여 체불 신고 중윗값은 572만원으로 600만원이 되지 않았다. 일시적 경영난을 겪는 사업장에서 퇴직금을 주지 못한 결과로 분석된다. 실제로 체불 발생 사유를 분석한 결과 일시적 경영악화가 퇴직금(65.1%)과 퇴직연금(57.6%) 모두 가장 높았다. 사업장 도산·폐업으로 인한 체불이 퇴직금 14.6%, 퇴직연금 33.1%로 뒤를 이었다.
개인 자산 운용권 침해 vs. 사회 전체로 노후 보장 강화
다만 전문가들은 각각의 방식엔 나름의 장단점이 공존하는 만큼 제도 도입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우선 일시불로 받는 퇴직금은 목돈을 한 번에 활용할 수 있어 퇴직 직후 가용 재산이 늘어난다는 이점이 있다. 퇴직연금 의무화를 추진할 경우 피고용자 개인의 선택을 침해한다는 비판에 마주할 수 있지만, 일시불로 받는 퇴직금은 개인사업체나 대출 등에 활용하는 등 단기간에 자금을 굴리기 용이하다.
반면 회사 입장에서는 일시불로 퇴직금을 주기 위해선 사내에 돈을 적립해 둬야 해 부담스러울 수 있다. 특히 영세한 업체의 경우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 돈을 제때 적립하지 못해 퇴직금이 체불될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하지만 퇴직연금은 근로자가 재직하는 동안 회사가 반드시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해야 하기 때문에 체불 우려가 낮은 편이다. 애초에 퇴직연금제가 기존의 퇴직금이 회사 파산으로 없어지거나 피고용인이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은 이후 목돈을 무분별하게 써버리는 등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됐다.
고용부의 현 계획대로라면 국민연금과 비교해 수익률이 낮은 퇴직연금 자산을 전문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퇴직연금공단을 신설에도 힘이 실릴 예정이다. 고용부는 각 공단에서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등을 운영하는 것처럼 퇴직연금도 공단을 통해 효율적으로 운영해 수익률을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 경우 퇴직금 의무화 시행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노후 보장이 강화되고 국가의 복지비용이 절감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개인과 국가 모두에 유익한 제도로 정착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퇴직연금 사업자인 은행·보험사·증권사는 퇴직연금 기금화에 반대하고 있어 공단 설립 과정에 갈등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431조원에 달했으며, 규모는 나날이 커져 2050년이면 국민연금 규모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금융사 입장에서 공단 설립은 퇴직연금 관리 수수료라는 주요 수입원 공백을 시사한다.